또 다시 무지개를 볼 때
이른 아침, 저는 해변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방금 비가 한바탕 쏟아졌기 때문에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해변의 오솔길에는 행인들이 드물어 아주 고요해 보였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때 바닷바람이 살며시 불어왔고 파도는 해안을 살며시 때렸는데, 마치 소곤소곤 대는 것 같았습니다. 갈매기 떼들이 바다 위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아침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멀리 보이는 해수면 위로 무지개가 저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매일 반드시 해야 할 4가지
우리는 주님을 믿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 동안 성경을 읽어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진정한 효과를 볼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깃들어 있는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마음을 다해 되새기고 묵상해야 합니다. 절대 주마간산식으로 대충 훑어보거나 성경 몇 구절을 암송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마음으로 읽고, 마음을 다해 찾고 구하며, 성령의 깨우침을 받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들림받네
마음속으로 많은 기도드리네
하나님이 그에게 돌아오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니
그들 모두는 빛 속에서 사네
성령께서 말씀을 깨우쳐 주사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하세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게 하소서!
우리의 성정이 변화되도록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소서!
우리를 온전케 하사 당신과 동심합의하게 하소서!
우리를 훈계하셔서 당신 위해 본분을 완수하게 하소서!
성령께서 매일 우리를 인도하사
복음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확장열람: ‘나비의 꿈’ Song 정잘해
모두가 선악을 분별하고 진리 실행하게 하소서!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시고 교회가 방해받지 않게 하소서!
모두가 사랑스러운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 드리게 하소서!
모든 방해물들을 제거하사
하나님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게 하소서!
마음으로 늘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떠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예정한 자들이 당신 앞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백성들이 영광 얻으신 당신께 찬양하게 하소서!
백성들과 함께하시고
우리로 당신의 사랑 속에서 늘 살게 하소서!
백성들과 함께하시고
우리로 당신의 사랑 속에서 늘 살게 하소서!
출처: 하나님의 약속
매일 성경 _ 마태복음 5: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이 말씀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계획은 절차가 있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차츰차츰 높아진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지 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는 성경 구약의 사역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사역을 행하였을 뿐이며, 그것으로 한 시대를 개척하고, 한 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했겠느냐? 하지만 그의 사역에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인들이 실행한 율법과 그들이 지켰던 계명과 다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는 율법을 지키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케 하러 왔기 때문이다. 완전케 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실제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그는 규례를 고수한 것이 아니라, 더 현실적이고 더 실제적으로 융통성 있게 행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때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주인이 왔으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온 것이며, 율법을 바꾸기 위해 온 것이기도 하다.』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 사역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을 조심해야 하고, 음란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등의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심과 동시에 또 당시 사람들의 분량과 새로운 사역의 필요에 따라 새 시대의 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 새 시대의 계명은 율법시대보다 더 실제적이고 시의적절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사역은 그 자신이 행하시는 것으로서 겉보기에 상충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질서정연하며 하나님의 세심한 배치하에 있습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어떤 사역을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한 단계의 사역보다 더 높은 사역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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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4:10 – 야베스의 기도 성경구절
역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매일 성경 _ 잠언 3:7

이 말씀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이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는 늘 자신을 너무 높이 보며, 자신이 하는 일은 다 옳고 그 누구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깁니다. 또 누구건 자신이 한 일이 틀렸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은 교만자대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타락한 성품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총명하고 자질이 있고 일을 간파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해도 자신이 직접 처리하고 하나님을 한쪽으로 밀쳐놓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아주 쉽게 거스를 수 있습니다. 당초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성경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장악한 성경 지식과 신학 이론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판단하여, 메시야는 틀림없이 그들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강림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하실 때 많은 진리를 선포하심과 동시에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진리인지 구하지도 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수하고 있는 관념이나 상상과 다르면 메시야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진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을 믿는 일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성경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스스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사역을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교만자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세의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대함에 있어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을 증거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세심하게 구하고 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야 하는 이것은 우리 피조물에게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진정한 피조물이라면 마땅히 창조주가 누구인지, 사람이 왜 창조되었는지, 피조물의 직책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창조주를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창조주의 뜻과 마음의 소리, 그리고 요구를 알고 이해하고 깨닫고 헤아려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라는 창조주의 말씀을 준행해야 한다.』
출처:하나님의 약속
회개 설교 —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을 말할까요? 우리가 하고 있는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일까요? 어떻게 해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함께 그 답을 찾아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회개 기도를 하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하게 살고, 타인을 포용하고 인내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복음 전도에 힘쓰며 착한 행실을 많이 하면, 참된 회개를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생각이 옳은 것일까요?

확장열람: 외적인 좋은 행위와 성품 변화의 차이
착한 행실이 참된 회개를 대신할 수 있는가
주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겸손함을 갖추고, 남을 포용하고 오래 참으며, 많은 것을 버리고, 복음 전파에 힘쓰는 등, 정말 행실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며, 재물과 악한 것을 좇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탄 성품에 따라 살고 있는 현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정에 축복을 주셔서 가족 모두가 무탈하고 평안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면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 순탄치 못하거나 결혼 생활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또는 생활고를 겪게 되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죠. 거기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보지 못하면 또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포용과 인내로 타인을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닌 경우에는 그런대로 실행할 수 있지만, 일단 자신의 이익에 크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익을 위해 싸우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착한 행실의 모양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저를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기 전에는 가족들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종종 화도 내고 가족들과 냉전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주님을 믿고 나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포용하고 인내하려고 노력했고, 성경 말씀 보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주님을 위해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정말 겉모습은 주님을 믿기 전과 많이 달라졌죠. 하지만 삶 속에서 가족들이 제 뜻대로 따라 주지 않거나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여전히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예전에는 전부 제가 억제한 거였지, 진정으로 말씀을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후, 자복하며 회개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착한 행실이 참된 회개를 대신할 수 있다면 죄 속에서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착한 행실을 행함에도 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는 것일까요? 왜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죄를 자복하는 삶을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착한 행실을 행하는 행위적인 변화가 참된 회개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을 볼까요? 그들은 외적으로는 아주 경건했고 율법을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늘 경전을 외우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했고, 항상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우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들이 왜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이건 무엇을 증명하는 걸까요? 외적인 착한 행실과 외적으로 규례를 지키는 것이 더는 죄를 짓지 않거나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참된 회개가 아니라면 언제든 다시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한복음 8:34~35)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외적인 착한 행실을 보이는 것은 참된 회개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이죠.
참된 회개는 무엇인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시록 22:14)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태복음 3: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위기 11:45)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라는 것은 죄성(罪性)이 변화받아 더는 죄를 범하지 않고 악행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기적이고, 간교하고, 교만함 등의 패괴 성품이 정결함 받고 변화받아 환골탈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적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사탄이 어떻게 시험해도 그 간계를 모두 간파하고 굳게 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고, 천국에 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간음을 범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노하시게 한 것을 알고 기도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했으며, 하나님의 벌을 달게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행을 깊이 뉘우쳤고,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죠. 이 이야기는 시편 6장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이 구절은 다윗이 얼마나 뉘우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다윗이 노년에 이불을 덮어도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자 신복들이 아리따운 동녀를 찾아 품에 안겨 주었지만, 다윗은 그 여자와 더불어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윗이 참된 회개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우리가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계속 죄를 짓고 다시 죄를 자백하기를 반복한다면 회개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란 사탄에 의해 패괴된 자기 자신의 실태를 진정으로 알고, 증오하고, 진정한 변화를 받아 더는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거역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려면 한 단계 더 심화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한복음 16: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한복음 12:48)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예언을 통해 말세에 하나님은 하나님 집에서부터 심판 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모든 진리를 알려 주시고, 그 진리로 우리의 죄를 심판하고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의 사탄 성품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게 되고 증오할 수 있으며,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참된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그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되어야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할 것인가
…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도, 결국에는 창조주가 배정해 놓은 운명의 길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이며, 또한 창조주가 권능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매일, 매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고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너희들의 경험과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따라 많이 느낄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진리의 실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가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이는 사람의 변화나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 지리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느냐로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와 기호,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천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권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권능을 갖고 있다. 그의 권능은 사람이나 사물, 공간,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권능을 행하고 큰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경영 사역을 계속하며 만물을 주재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며, 만물을 지배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실이며 태고부터 변함없는 진리이다!

확장열람: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인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고 알아야 할까? 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네가 삶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마음과 소원, 실제가 있다는 것을 어떤 태도로 분명하게 보여야 할까? 우선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다음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고심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열매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과 진리를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배정과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너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출처: 하나님의 약속
‘예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은혜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에서 ‘예수’로 바뀌었나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하다면 계속 그 이름을 써야 하지 않나요? 여기에 더 깊은 의의가 있을까요?” 이 문제는 분명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은 우리가 ‘왜 하나님은 은혜시대에 ‘여호와’가 아닌 ‘예수’라는 이름을 쓰셨고, ‘예수’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의가 있는지’에 대해 나눠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속성과 행사는 측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어떠한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름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람을 인도하고, 구속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에 따라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가졌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은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백성들의 삶을 인도하시며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율법과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의 정죄와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이 드러낸 성품은 진노와 저주의 성품이었습니다. 율법시대 말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 이미 율법으로 정죄되어 죽음의 형벌을 당해야 하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처음으로 성육신이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주님께 죄를 자백해 회개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자애로움과 긍휼하심은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사역하실 때 드러내신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마다 드러낸 성품도 모두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에 따라 바뀌었고, 이는 하나님의 항상 새로운 사역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학교에서 선생으로 일을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가 더 이상 선생으로 일을 하지 않고 직장을 새로 옮겨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만났을 때 여전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우리가 전에 했던 일에서의 칭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호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 직업에 따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고,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도 사역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확장열람: 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나님 이름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 사역의 목적은 더더욱 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 단락의 내용과 같습니다.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역사할 때 택한 이름으로, 원래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삶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을 의미한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구속하는 속죄제를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영 계획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이다.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고 있고, 그를 위해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인류를 죄에서 구속해 낸 속죄제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표하고 은혜시대도 대표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역사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표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표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표하며, 은혜시대에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제 하나님이 시대마다 취한 이름에는 모두 비범한 의의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역의 원칙, 시대별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이름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냥 흐리멍덩하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주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들을 인도해왔는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오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예수님의 재림을 더 잘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다른 이름을 취하신 것이 그 시대에 행한 사역과 성품을 나타내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실까 걱정할까요?
출처: 하나님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