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어떻게 임하실까요? 하나님 집에서 하는 심판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문제: 주님의 약속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근데 당신들은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주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은밀히 오셨다고 증거하는 것과 왜 다릅니까?

답: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신다는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시기에 주의 약속은 어김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할 건 주께서 성육신으로 다시 오셔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시는데 이건 어떻게 들림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느냐와 관련됩니다. 성경을 자세히 찾아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주께서 성육신으로 다시 오신다는 명확한 예언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2:40)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눅 17:24~25) 이런 예언에 ‘인자가 오리라’ ‘인자의 강림’을 언급했는데 ‘인자’라 함은 사람에게서 태어나고,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 영이라면 ‘인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이시니 ‘인자’라 칭할 수 없는 것처럼 천사를 본 사람도 있지만 천사도 영이니 ‘인자’라 칭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형상은 있지만 영체에 속한다면 ‘인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인자,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으시고 평범한 정상 사람으로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인자가 오리라’ ‘인자의 강림’은 다 말세에 하나님이 다시 성육신으로 오시는 걸 말합니다. 특히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고 하신 것은 주께서 성육신의 방식으로 오신다는 걸 더욱 증명합니다. 만약 성육신이 아닌 영체로 나타나신다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받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틀림없이 성육신으로 다시 오시고 또한 말세의 심판 사역을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왜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하실까요?”라고 묻습니다. 사실, 주님이 하시는 심판 사역은 이긴 자들을 온전케 하고 성도들을 맞이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 왜 말세에 심판 사역을 하시는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보겠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말세에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제일 많은데 적어도 200곳이 넘고 주께서 성육신하셔서 심판 사역을 하신다는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사 2:4)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8:9)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계 14:7)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행 17:31)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7)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2)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8)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벧전 4:17) 등등 이런 구절에서 분명하게 보다시피 하나님은 말세에 반드시 성육신으로 오셔서 심판 사역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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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말세에 성육신하셔서 말씀을 발표해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고 구원하십니다. 다시 오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슬기로운 처녀로서 주님과 함께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또한 주님의 예언이 응한 겁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 25:6) 이런 슬기로운 처녀들은 주의 음성을 듣고 나와 영접해 자신도 모르게 보좌 앞으로 들림받아 주를 뵙고 하나님의 말세의 심판, 정결케 함, 온전케 함을 받아들여 최종에 하나님 말씀의 심판에서 타락 성정이 정결케 되고 하나님께 이긴 자로 온전케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주님의 약속을 받으려면 반드시 말세의 그리스도, 하나님 앞으로 와서 말세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고 체험해서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아니면 들림받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너는 예수가 말세에 강림할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떻게 강림하는가? 너희 같은 죄인은 이제 갓 구속되었을 뿐, 변화의 과정과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너 같은 옛 사람을 예수가 구원해 온 것은 틀림없다. 또한 네가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결코 죄가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네가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너는 속이 여전히 더럽기만 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강림하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좋은 일이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 과정이 하나 빠졌는데, 구속되었을 뿐 변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구속만 될 뿐 거룩하게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과 더불어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 중의 한 단계, 바로 변화되고 온전케 되는 가장 중요한 한 단계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갓 구속받은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기업을 곧바로 이어받을 수 없다.』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가져온 것은 장구(長久)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경로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게 되는 유일한 경로이다. 네가 만약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ㅁ찾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는 역사(歷史)의 꼭두각시이고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황당무계한 사람이며, 그리스도가 가져온 생명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허황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말세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이 혐오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말세에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대문이므로 아무도 피해갈 수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가 없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을 말씀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바로 천국의 대문이십니다. 만약 말세의 그리스도가 하시는 심판 사역을 체험하지 않고 정결케 되거나 온전케 되지 못하면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권세입니다. 이건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반드시 성육신하셔서 심판 사역을 하신다는 걸 증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사실입니다. 말세 역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림받아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건 사람의 상상일 뿐이지 절대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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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들은 “만약 주님께서 정말 성육신으로 오신다면 성경 곳곳에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 각 사람이 보리라고 예언한 건 또 어떻게 해석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주께서 구름 타고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신다는 예언들을 말씀하셨는데 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주께서 은밀히 오신다는 예언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계 16:15)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 24:44)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2) 보시다시피 주님의 재림은 두 가지 방식인데 하나는 은밀하게, 또 하나는 공개적으로 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말세에 성육신으로 은밀하게 강림하여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긴 자들을 만드신 후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이 끝나고 큰 재난이 내리고 하나님께서 상선벌악하시며 재난 뒤에 주님께서 구름 타고 만국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십니다. 오늘 저희가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말세 심판 사역을 하신다고 증거하는 건 주님이 은밀하게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겁니다. 성육신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면 모습은 평범한 정상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 은밀한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참된 신분을 모르다가 인자께서 사역하시고 말씀하신 후, 그분의 음성을 분별하는 사람만이 그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분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분을 평범한 사람으로 여기며 부인하고 거절할 겁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사역하실 때 겉모습을 보면 평범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봤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은밀하게 사역하셔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단계인데 말씀을 발표해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십니다. 이때는 주님이 구름 타고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이긴 자들을 만드신 후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이 끝나고 큰 재난이 내리고 하나님께서 상선벌악하시며 그 뒤에 만국 만민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때면 주님이 공개적으로 임하시는 예언이 응합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4:30)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계 1:7) 주께서 구름 타고 공개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신다면 이치대로는 사람들이 다 기뻐해야 하는데 그럼 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애곡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때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은밀하게 오셔서 하신 구원 사역이 이미 끝나 상선벌악의 사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을 거절한 사람들은 구원의 기회를 완전히 잃는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 즉 말세의 그리스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대적한 하나님이 바로 재림 예수이심을 보고 어찌 가슴 치며 통곡하고 이를 갈며 애곡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때면 “모든 족속이 애곡”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을 마음에 두지 않겠지만, 나는 그래도 예수를 따르는 소위 각 성도에게 알리겠다. 너희가 육안으로 예수가 흰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직접 볼 때는 공의로운 해가 공개적으로 나타난 때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너의 마음은 몹시 격동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알고 있는가, 예수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볼 때는 네가 지옥으로 내려가 징벌을 받는 때이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끝났음을 선고하는 때이며, 예하나님이 상선벌악(賞善罰惡) 하는 때라는 것을. 왜냐하면 사람이 이적을 보기 전에 오직 진리만 발표되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이적을 구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여 정결케 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와 조물주의 품속에 안기게 되었다. 하지만 ‘흰 구름을 탄 예수가 아니라면 거짓 그리스도이다’라는 신념을 고집하는 그 사람들은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예수만 믿으면서 엄한 심판을 발표하고 생명의 참 도를 베푸는 예수는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가 공개적으로 흰 구름을 타고 다시 올 때에 그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예수의 재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구원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죄받는 표가 된다. 너희는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말고, 무지하고 교만방자한 사람이 되지 말며, 성령의 인도에 순복하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찾고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에게 유익하다.』 (<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에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꾸었을 때이다>에서 발췌)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말세에 성육신하셔서 하신 은밀한 사역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이며, 또한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 중에서 사람을 온전케 하는 천재일우의 기회이고, 하나님의 은밀한 사역을 받아들여 온전케 된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가장 복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고 하나님이 이긴 자들을 온전케 하시는 이 사역을 놓친다면 최후엔 이를 갈며 애곡하고 슬피 울며 후회할 것입니다.

영화 대본 <경건의 비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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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신앙 문답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마 12:1)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우선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하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2)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된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며,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렸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관념을 깬 것으로서, 그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린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이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이라는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그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할 때, 즉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할 때, 그러니까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갈 때, 사람이 지난날의 관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새 사역을 가져올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시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속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으며,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해방과 자유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정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시고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이며,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으로 반대하고 대적해도 말이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거나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다.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질 것이다. 그가 어떤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길이었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상이나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살고 있는데, 자유가 조금도 없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도 뒤따라 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할 수 없고 모레는 이사할 수 없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이나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는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의미한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주 예수가 말하는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성육신한 주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하의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긴 것, 즉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오직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이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는 성전을 가리키는데,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제 너희는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므로 값나가는 물질 그 무엇으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겠다. 배가 고플 때, 너는 음식물로 배를 채워야 한다. 그 음식이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안타깝지 않겠느냐? 마음이 갈급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감정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본다.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역부족이라 느낄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밥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아니며, 일시적인 육적 안일과 만족은 더더욱 아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온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이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람은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체험 가운데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왜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람이 한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해도, 진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에 안식을 선사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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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마 12:1)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우선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하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된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며,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렸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관념을 깬 것으로서, 그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린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이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이라는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그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할 때, 즉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할 때, 그러니까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갈 때, 사람이 지난날의 관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새 사역을 가져올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시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속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으며,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해방과 자유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정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시고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이며,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으로 반대하고 대적해도 말이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거나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다.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질 것이다. 그가 어떤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길이었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상이나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살고 있는데, 자유가 조금도 없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도 뒤따라 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할 수 없고 모레는 이사할 수 없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이나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는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알려 주실까요 (2)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의미한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주 예수가 말하는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성육신한 주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하의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긴 것, 즉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오직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이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는 성전을 가리키는데,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제 너희는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므로 값나가는 물질 그 무엇으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겠다. 배가 고플 때, 너는 음식물로 배를 채워야 한다. 그 음식이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안타깝지 않겠느냐? 마음이 갈급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감정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본다.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역부족이라 느낄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밥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아니며, 일시적인 육적 안일과 만족은 더더욱 아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온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이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람은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체험 가운데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왜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람이 한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해도, 진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에 안식을 선사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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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비유했는데, 어떤 뜻이 담겨져 있습니까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로마서 8:3) 이 성경 구절을 통해,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류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구속 사역을 하셨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어린양으로 비유되었는데, 여기에 어떤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속죄제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4장 27절에서 3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소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희생의 기름을 취한것 같이 취하여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그리고 레위기 16장 30절과 3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반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했고, 율법으로 그들이 땅에서 생활하도록 이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점차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어 돌에 맞아 죽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속죄 제물을 바쳐야만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사함받을 수 있었고 율법에 의해 정죄되거나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매년 7월 10일은 이스라엘의 속죄일로, 이 날이 되면 백성들은 처음 난 흠이 없는 소나 염소를 속죄 제물로 삼아 제단에 바침으로써 사람들이 한 해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소나 염소의 피로 사람의 죄를 덮어 죄 사함의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은 소나 염소의 피를 사람의 죄를 정결케 하는 증거로 삼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바쳐진 속죄 제물로 말미암아 율법에 의해 정죄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축복과 돌보아 주심을 구할 자격이 있게 된 것입니다.

  율법시대 말기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수록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며 죄짓는 횟수도 갈수록 빈번해져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효과에 달할 수 없게 되었고 성령께서도 그들을 증오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락하여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 15절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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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의 인류가 어느 정도까지 타락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진노하고 그들의 죄행을 책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계속 그렇게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의해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미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로 가득찼고 죄 속에 살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가호를 빌었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한 속죄 제물을 얻을 수 있도록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역시 당시의 타락한 인류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 자신의 경륜에 근거하여 인류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도록 성육신으로 인간 세상에 오셔서 속죄제인 어린양이 되심으로 사람의 죄를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이사야 53:6~12)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사역을 행하실 때,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곧 속죄 제물인 어린양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장 29절에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서 3년 반 동안 사역을 하셨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셨으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고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 하셨으며, 결국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 인류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에서 율법 아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구속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능히 사할 수 있는 속죄 제물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던 사람들의 소망이 실현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더는 속죄 제물을 바칠 필요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죄는 더 이상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데에 장애물이 아니고, 더는 사탄이 사람을 참소하는 약점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율법하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고, 예수님 앞에 나와 기도할 수 있었으며 죄 사함을 얻고 은혜받을 자격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류는 계속 생존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속죄제인 어린양으로 비유된 것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을 완수하고 인류를 고통의 세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는 사람에게 정죄를 당하고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했다. 그가 받은 그 모든 고난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가 받은 고난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헌신을 의미한다. 또한 인류를 구원하고 사람의 죄를 속량하고 그 단계의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 받은 모든 굴욕과 대가를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이 인류를 십자가에서 속량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피의 대가이고 생명의 대가이며, 그 어떠한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그는 자신이 육신에서 앞으로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가 직면할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서 무기력하고 율법 아래에서 불쌍히 살며 힘없이 발버둥 치는 인류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아파 왔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마음은 더 절박해졌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든, 자신이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되든지 간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담당할 사명이 무엇인지 갈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서 빨리 담당하고자 하는 사역, 즉 사람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하는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면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고 하나님도 속죄제로 말미암아 더는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쳐 희생하고 싶었으며, 또한 속죄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 를 진심으로 바랐다. 게다가 하루빨리 그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인류 생활의 참상을 본 그는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더 빨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당할 극심한 고통과 수모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자신을 바침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며, 죄 속에 살던 인류의 삶과 처지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는 신념뿐이었다. 그의 신념과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다 인류를 구원하는 사업과 관련이 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다음 단계의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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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락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지고지상하신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주재자로 자신을 낮추셔서 육신에 거하심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을 하심과 동시에 보통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 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직분을 담당하기 시작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모진 굴욕과 고통을 당하셨고 타락한 인류에게 버림받고 정죄받는 치욕을 참아 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지만, 오히려 더럽고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셨는데 그 고통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영과 육이 엄청난 고통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온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인류의 속죄 제물인 어린양으로 비유한 것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이 인류를 죄에서 구속한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고 또 말세에 다시 오셔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베풀어 주시며,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성을 철저히 제거하고 정결케 하는 심판 형벌 사역을 하여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철저히 벗어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베드로전서 4:17),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베드로전서 1:5),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세에 더 큰 구원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하심으로 진리를 선포하셔서 사탄에 의해 타락한 인류를 철저히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은 받았지만, 죄짓는 본성은 여전히 존재하여 낮에는 죄짓고 밤에는 죄를 자백하는 삶을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고 깊다는 것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님, 이번의 교제를 통해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인류의 속죄 제물인 어린양으로 비유된 의미를 잘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아울러 여러분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철저히 구원하심으로, 낮에는 죄짓고 밤에는 죄를 자백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시고 완전히 정결케 되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갈 날을 기대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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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성육신 하여 인류를 구원해야만 했던 이유

어떻게 해야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1.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2. 주의 사랑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이 두 구절 중 하나는 용서를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사역할 내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하나님은 성육신할 때, 특정 단계의 사역과 함께, 그 시대에 보이고자 하는 성품, 구체적인 사역 항목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인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하는 사역의 범위를 중심으로, 그보다 넘쳐 나거나 부족하게 행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해당 시대와 관련이 있다. 사람의 방식이나 언어로 표현하든 신적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과 입장에서 표현하든 그에게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바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사람이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방식과 입장을 통해 그의 뜻과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사람이 알게 할 것이다. 그래서 은혜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명하려는 바를 인간적 언어로 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아울러 많은 경우 그는 평범한 길 안내자의 위치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며, 사람이 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러한 사역 방식은 은혜시대 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사람과 훨씬 친근해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형식과 방식상에서 훨씬 더 실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가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숫자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당시에 이렇게 비유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그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는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어떤 개념일까? 바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을 자신의 책임, 필수 과제이자 ‘길’로 삼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비유에 불과하지만, 이 표현은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비유를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을 찾았으며, 실행의 원칙과 기준을 얻었다. 그리고 이해와 관용을 베푸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조건 없이, 횟수의 제한 없이 사람을 용서하라는, 용서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확실한 이해를 얻었다. 예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그가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숫자를 생각했겠느냐?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정해져 있느냐? 많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횟수’에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기원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왜 예수의 입에서 이러한 숫자가 나왔는지 궁금해하며, 이 숫자에 분명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숫자는 하나님이 인성으로 말씀한 비유에 불과하다. 설사 어떤 숨은 의미나 함의가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와 관련된다. 하나님이 성육신하기 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한 말씀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말씀의 관점과 말씀이 나온 배경을 사람은 볼 수 없고 닿을 수도 없었다.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선포된 것이라 육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후에는 영계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람과 대화하게 되었다. 사람의 관념적인 상상이나 삶 속에서 보고 접하는 일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그리고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그의 신적 성품과 마음, 사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전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이해 가능하고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으로 사역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사역 방식과 원칙이 대부분의 경우 인성을 통해 이루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신성으로 사역해서는 얻기 힘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인성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 내용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방식도 유연하고, 형식상으로도 율법시대를 초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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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말씀은 직접 신성으로 선포한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인자가 인성으로 한 말씀이다.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자신의 생명을 보살피듯 보살핀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 신성에는 이러한 언어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신조로 삼아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속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그의 성품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 일부러 무엇을 하거나 특정 방식과 도덕 규범을 따르려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는 원래부터 이런 본질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은 인성으로 사역할 때, 인간적인 형식으로 많은 말씀과 진리, 방식을 전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뜻도 함께 전하여 사람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 본질과 속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성육신한 인자는 최대한 많이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본질을 나타냈다. 인자의 인성은 결코 사람이 하늘의 하나님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데에 있어 방해물과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와 창조주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자 다리이다. 이쯤에서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사역의 성격과 방식 중 일부는 지금의 사역과 아주 많이 유사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지금 단계의 사역에서도 많은 인간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했다. 또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말하는 것이나 인류의 지식 차원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이용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나님이 일단 성육신하고 나서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신적인 입장에서 말씀하든, 많은 말이나 표현 방식은 모두 사람의 말이나 방식을 매개체로 사용한다. 즉, 하나님이 성육신했을 때는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면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은 성장 과정에서 인성을 통해 사람의 지식, 상식, 언어 혹은 표현법을 이해하고 배우고 파악하게 된다. 피조물인 인류에게서 비롯된 이러한 것들이 성육신 하나님께 갖춰져, 그가 하나님의 성품 혹은 신성을 전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의 언어로 더 적절하고 실제적이며 정확하게 사역할 수 있게 됨으로써, 사람이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사역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더 실제적이지 않으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냐? 하나님이 성육신하고, 그 육신이 사역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이 장차 실제적으로 발현될 때이다. 그리고 인자가 정식으로 직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세대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사역을 곧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육신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과 사역을 할 것임을 의미한다. 아울러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곧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전 인류를 향할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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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사역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어떻게 분별하는가?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 성육신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이 있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짜이다. 그리스도란 땅에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땅에서 사역을 전개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역사를 완성하는 하나님만의 특유한 육신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육신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육신이며, 하나님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육신이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이다. 그리스도로 사칭하는 자들은 조만간 다 넘어질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그리스도라고 자칭하지만, 그리스도의 실질은 전혀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짜와 가짜는 사람이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답하고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말씀이 육신 된 이상 곧 하나님의 실질이 있고, 말씀이 육신 된 이상 곧 하나님의 발표가 있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 된 이상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가져오고, 말씀이 육신 된 이상 하나님의 소시(所是)를 발표할 것이며, 말씀이 육신 된 이상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줄 수 있고 생명을 베풀어 줄 수 있으며 길을 가리켜 줄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실질을 갖추지 않은 육신이라면 결단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 아니다. 이 점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인지를 알아보려면, 그가 발표한 성품과 말씀에서 확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인지, 혹은 참 도인지를 확정하려면 반드시 그의 실질로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인지의 관건은 그 실질(역사, 말씀, 성품 등등, 더 많은 방면)에 있지 그의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약 그의 겉모습을 고찰하느라 그 실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앞에 쓴 말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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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육신한 하나님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인데, 이 육신은 육체에 속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다. 같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혈기에 속하지 않는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있는데, 그의 신성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에서의 모든 정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다 천부의 뜻에 순복한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영이자 신성이므로, 그의 실질 자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다. 이 실질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할 리가 없으며, 그는 자신의 사역을 허무는 일을 할 리가 없고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할 리도 없다. …

……

…비록 그리스도가 육신에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친히 하고 있지만, 그는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도 않고 육신에서 비미은장한다.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그리스도의 속성이 없다. 거짓 그리스도의 교만방자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성정으로부터 도대체 어떠한 육신이라야 그리스도인지를 대조해 낼 수 있다. 거짓 그리스도일수록 더욱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고, 더욱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을 미혹한다. 거짓 그리스도라면 하나님의 속성이 없고, 그리스도라면 거짓 그리스도의 성분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성육신된 것은 단지 육신에서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지,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사역으로 자신의 신분을 실증하고, 자신의 유로로 자신의 실질을 실증한다. 그의 실질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분은 자신이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사역과 그의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발표가 그의 실질을 결정한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부탁을 완성할 수 있고,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의 자연적인 유로도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유로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발표한 것이 모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교육하거나 수년간 양성한 결과가 아니며, 그 자신이 배운 것이나 꾸며 낸 것도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천부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에서 발췌

  『지금 만약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많은 이적을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 예수가 온 것이라고 자칭한다면, 그것은 악령이 가장한 것이고 악령이 예수를 모방한 것이다. 이 점을 기억하여라! 하나님은 중복된 사역을 하지 않는다. 예수의 그 단계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이후에 그 단계 사역을 다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다. 마치 구약의 예언에 메시아가 오리라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예수가 온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약 메시아가 또 온다면 맞지 않는 것이다. 예수가 한 번 왔었는데, 이번에 또 ‘예수’가 온다면 그것은 맞지 않다. 한 시대에는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어떤 이름이나 다 시대성이 있다. 사람은 관념으로 하나님이 언제나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야 하고 언제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야 하며 언제나 예수와 같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말세에 또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면서 예수가 한 것과 똑같이 한다면, 하나님의 사역은 중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사역은 의의가 없게 되고 가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 시대에 한 단계 사역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매번 한 단계 사역을 하고 나면 악령이 잇따라 모방하는데, 사탄이 하나님을 뒤따르면 하나님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바꾼다.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끝마치면 악령이 모방한다는 이 점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현재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어떤 사람들은 악령이 들려 “나는 하나님이다!”라고 계속 외쳤지만, 결국 서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가 잘못 대표하였고, 대표한 것이 사탄이어서 성령이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아무리 높게 말하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피조물이고 사탄에게 속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외친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외칠 필요가 있겠느냐? 높이 치켜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하는 데에는 사람이 그에게 지위를 줄 필요가 없고, 사람이 그를 존칭해 줄 필요도 없다. 그가 하는 사역이 바로 그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 예수는 세례를 받기 전에도 여전히 하나님 자신이 아니었더냐? 여전히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었더냐? 설마 그가 증거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었겠느냐? 그가 사역을 하기 전에 이미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지 않았느냐? 네가 새 길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영을 대표하지 못하고, 영의 사역과 영의 말씀을 발표하지 못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지 못하고, 영이 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 기묘, 난측(難測) 그리고 사람을 형벌하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도 발표하지 못한다면, 네가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자칭해도 소용없다.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질은 없다. 하나님이 왔으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 사역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영을 대표하여 역사한다. 네가 그를 사람이라 칭하든, 하나님이라 칭하든, 주님이라 칭하든, 그리스도라 칭하든, 또는 그를 자매라 칭하든 다 괜찮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영의 사역이며,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는 사역이다. 그는 사람이 그를 어떻게 칭하든 개의치 않는다. 그에 대한 사람의 호칭이 그의 역사를 결정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를 어떻게 칭하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하나님의 영이 성육신된 것이고, 말씀으로 된 육신이고, 영을 대표하며, 영이 인정하는 분이다. 네가 새 시대의 길을 이끌어 낼 수 없고 옛 시대를 끝마칠 수 없으며, 새로운 시대도 개척할 수 없고 새로운 사역도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라고 칭할 수 없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1)>에서 발췌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신성의 소시(所是)를 발표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이 없고, 그의 몸에는 하나님이 본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과 사람의 본분의 구별>에서 발췌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사람을 미혹하는 그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지 못하고, 본래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며, 미혹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신분이 없기 때문이다.』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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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교통 참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체험한 사람은 다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한 단계 새로운 사역을 하실 때마다 사탄과 각종 악령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하고 가장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으니 사탄 악령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성령이 사람에게 방언을 주셨으니 악령도 사람을 지배하여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위 ‘방언’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악령이 설령 사람의 갖가지 필요에 영합하여 갖가지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일을 어느 정도 나타내어 사람을 미혹한다 해도 사탄 악령에게는 조금도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토록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영이 육신에 실제화하고 비미은장(卑微隱藏)하여 역사하며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험하여도 조금의 원망도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이면서도 전혀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고 스스로 과시하지도 않으셨으며, 더욱이 지위에 서지도 않으셨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셨는데, 완전히 하나님의 존귀와 거룩이 비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더없이 존귀한 생명 실질을 나타냈고, 그분이 바로 사랑의 화신임을 나타냈습니다. 각종 거짓 그리스도와 악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악령은 언제나 미리 그것이 그리스도라고 외쳐 대며, 그것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를 쓰고 사람들로 그것과 대면하게 하며, 허풍떨고 드러내고 뽐내며, 또는 표적과 기사를 좀 나타내어 사람을 미혹합니다. 사람은 미혹되어 받아들인 후에 오랫동안 진리의 공급이 없어 조용히 넘어졌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게 길이 없으며, 따르는 사람도 조만간 창피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다시 뉘우친다면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주요한 것은 그리스도만이 진리, 길, 생명임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에게는 절대로 진리가 없고, 각종 악령에게도 절대로 진리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든, 얼마나 많은 책을 쓰든, 그 속에 조금의 진리도 없는데,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리를 발표하실 수 있는데, 이 한 가지에 근거하여 분별하는 것이 가장 관건입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억지로 그분을 받아들이게 하시거나 그분을 시인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 갈수록 명확해지고, 길은 가면 갈수록 더욱 환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겨우 몇 마디 모방하는 말과 흑백을 전도하는 말만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진리도 없으며, 사람에게 흑암만 가져다주고 사람에게 재난만 가져다주고 사람에게 악령 역사만 가져다줄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사람을 미혹한 사례 분석ㆍ앞에 쓴 말>에서 발췌

『어떻게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합니까? 이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당신이 좀 얘기해 보세요.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지, 당신이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좀 말해 보세요, 말해 내지 못하겠으면 써도 돼요. 당신이 신성 발표의 그런 말씀을 좀 써서 저에게 주세요. 당신이 몇 마디 인성의 말을 모방해서 가장할 수 있으니까, 몇 마디 더 말해 보세요. 저에게 3시간 얘기해 보세요. 얘기할 수 있는지, 저에게 진리를 3시간 교통해 보세요. 하나님의 소시와 하나님의 이 단계 역사를 얘기해 보세요. 저에게 명확히 말해 보세요. 한번 시험 삼아 해 보세요. 당신이 말하지 못하면 곧 거짓이고 악령이죠. 참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며칠이나 말씀하셔도 다 괜찮아요. 참 그리스도가 발표하신 말씀은 백만 자나 넘는데, 이래도 다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다 말씀하시려면 끝이 없죠. 언제 어디서나 다 말씀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 말씀은 전 세계 어떠한 인류도 써낼 수 없는 말인데, 그럼 신성이 없다면 써낼 수 있겠어요? 말씀해 낼 수 있겠어요? 당신은 거짓 그리스도라서 신성도 없고 하나님의 영도 안에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낼 수 있겠어요? 당신이 몇 마디 모방할 수는 있지만 그 몇 마디를 몇 분간 말할 수 있겠어요? 사람은 모두 머리가 있어 몇 마디 같은 거야 다 외울 수 있어요. 당신이 저에게 1시간 말하고 2시간 진리를 교통해 주세요. 한번 시험 삼아 해 보세요.” 이렇게 그와 따지면 그는 끝장날 것이고 멍해질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줄행랑을 칠 것인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말하세요.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이신데, 그럼 제가 좀 듣고 보게끔 당신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표해 보세요. 당신이 발표할 수 있으면 제가 당신을 그리스도라 하겠지만 당신이 발표할 수 없으면 곧 악령이죠!”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는 분별하기 아주 쉽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에게는 진리가 없고, 적그리스도에게도 진리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진리가 있으면 그가 그리스도이지만 진리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세요. “당신이 그리스도의 소시를 발표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시를 발표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사람을 속이는 거에요. 그리스도는 곧 진리인데, 당신이 진리를 발표해 보세요. 몇 마디나 발표할 수 있는지 어디 봅시다. 만약 두어 마디 흉내내는 거라면 당신이 발표한 게 아니라 흉내내고 도용(盜用)하고 모방한 거에요.” 바로 이렇게 분별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사실, 즉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 어떻게 나타나셨는지 얘기해 봅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서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아주 많이 발표하여 몇십 만자 발표할 때까지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몇십 만자면 책 한 권인데, 삼사 백 페이지나 되어도,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받고서 “와!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이 음성을 발하신 것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이 음성을 발하신 것이라고 여겼는데, 후에는 일곱 영이 발하신 음성, 일곱 배로 강화된 영이 발하신 음성이라 말하였고, “일곱 영이 발하신 음성” 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여긴 것입니다. 후에 하나님이 말씀을 아주 많이 하셨는데, 몇십 만 자를 말씀하신 후에야 무엇이 성육신인지, 무엇이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난 것인지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야 사람이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와! 하나님이 성육신하셨구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는 성육신 하나님이시구나!” 보세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데는 바로 비미은장(卑微隱藏)하신 것입니다. 최후에 하나님이 그분의 모든 말씀과 발표해야 할 말씀을 다 발표하셨을 때에도, 사역하고 설교하실 때에도 전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내가 하나님이니까 너희들이 내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는 몇 마디 말하지도 않고 미리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이러면 가짜가 아니겠습니까! 참 하나님은 비미은장하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적 없지만 사탄과 악령은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를 좋아하는데, 이 방면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설교 교통 (1)ㆍ문제 해답>에서 발췌

『지금 만약 누가 여러분들을 미혹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발표할 수 있는지를 보세요. 이러면 그에게 신성의 실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말해 낼 수 없고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음성을 발표할 수 없다면, 그에게는 절대 하나님의 실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가짜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일부 사람들이 한 말은 사람이 말해 낼 수 있는 말이 아님을 보았어요. 그가 예언도 할 수 있고, 사람들이 모르는 일이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일도 다 명확히 말할 수 있는데, 그러면 그가 하나님이 맞나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방금 말했듯이, 그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말해 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성육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남들이 모르는 일을 말해 내고 사람의 이후의 일을 말해 내고 한 국가에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말해 낼 수 있다고 해서, 꼭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닙니다. 악령도 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그에게 “저에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가 당신에게 이후에 어떤 재난이 닥치게 된다든가, 언제 죽는다든가, 이후에 당신 가정에 어떤 사고가 날 수 있다든가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일은 응하는 일도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일을 말해 낼 수 있다 하여 이는 하나님의 소시가 아니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범위가 아닙니다. 이것만은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악령이 참견하기 좋아하는 쓸데없는 일이지,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매번 성육신하여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이지, 이 사람이 이후에 어떻게 되고 몇 살까지 살고 아이를 몇을 낳고 어느 때에 어려움이 있다고 예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을 예언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것을 예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말해 보세요. 하나님이 이런 일을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천지 만유가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니,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아십니다. 악령이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유한한 것입니다. 악령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악령이 한 사람의 운명과 한 국가의 운명과 한 민족의 운명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경영에 관한 일을 모르고, 인류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모르며, 인류의 진정한 귀착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더욱이 세상이 언제 끝나는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 하나님 나라가 이후에는 어떤 미경(美景)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을 그것이 다 모르고 어떠한 악령도 모릅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입니다. 각종 악령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유한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의 가장 큰 예언가가 말세에 발생할 일부 일들을 말해 냈는데, 지금 다 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말세에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를 모르고, 더욱이 하나님이 오셔서 무엇을 성취시키시는지, 이후에 천년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모르며, 하나님 나라 이후의 일은 더욱 모릅니다. 이런 일들은 어떠한 악령도 모르고 하나님 자신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관련된 일이라면, 악령도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에게 “저의 이후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요? 우리 가정 형편이 어떻게 될까요?”라고 묻는다면, 일부 악령들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에게 “제가 하나님을 믿으면 귀착지가 있을까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모릅니다. 악령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유한한 것입니다. 만약 악령이 일부 유한한 일을 말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악령입니다. 만약 정말로 누군가가 악령도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말해 낼 수 있고 사람의 이후의 일을 말해 낼 수 있다고 여기고, 심지어 이전에 사람이 어떤 일을 어떻게 어떻게 하였다는 것도 말해 낼 수 있다 해서 이 사람을 정말 신기하다고 여긴다면, 이러한 사람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을 너무나 잘 모르고, 당신이 악령의 그깟 재능을 너무 신기하다고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으로 삼아 대하였음을 증명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인식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어떤 악령이 무슨 표적과 기사를 나타낸다 해도 우리를 미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한 가지는 사람이 확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령은 진리가 아니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며, 그것이 창조주가 아니므로 인류를 구원할 수 없고 다만 인류를 패괴시킬 뿐입니다.』

<설교 교통 (2)ㆍ하나님의 사역과 사람 사역의 구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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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 영적 분별

연이은 재난은 주의 재림 징조입니다. 예수님 재림을 맞이할 방법은?

    지금 보면, 갈수록 큰 재난이 닥치고 있습니다. 특히 2019년부터 2020년 사이에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이미 중국을 넘어 전 세계 20여 개 국가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감염자 수는 37,567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813명으로 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계속 확산되고 있으며 사망 인원도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2019년 9월부터 2020년 1월까지 호주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5900개 이상의 건축물(2204 가구 포함)이 불에 탔으며, 33명이 사망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약 10억 마리에 이르는 야생 동물이 죽었고, 산불은 아직도 진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월 18일 ‘100년’ 만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일부 지역은 정전으로 많은 사람이 불편을 겪고 있으며, 많은 담수 생물이 죽었습니다. 2020년 1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홍수로 수만 명이 집을 잃었고 사망자도 60명에 이릅니다. 이처럼 연이은 재난과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 네 번의 현상을 보면서 주 안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의 재림에 관한 예언이 이뤄졌는데, 혹시 주님이 오신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 것일까? 우리는 어디 가서 주님의 자취를 찾아야 하는가?’

연이은 재난은 주의 재림 징조입니다

  이런 주제에 관해 우리는 말세에 주님이 어떤 방식으로 오시는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서 구름을 타고 가셨으니 오실 때도 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시록 1:7),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30)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아직도 주께서 구름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은밀한 재림입니다. 즉,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계시록 16:15),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태복음 25:6),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24~25)

  이런 구절을 살펴보면 “도적 같이” “밤중에 소리가 나되” 등의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말세에 주께서 재림하실 때, 조용하게 은밀히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자”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는 말세에 성육신하신 인자의 모습으로 은밀이 오심을 말합니다. 인자라 함은 사람을 통해 태어남을 말합니다. 부모가 있고 피와 살이 있는 몸으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라는 구절도 말세에 주께서 인자의 모습으로 오심을 말합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은 평범하고 범상하기에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고 심지어 정죄하고 배척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또 많은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예수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여 사역하실 때, 많은 사람이 그가 메시야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관념과 생각에 따라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과 같습니다. 만일 말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모습인 영체로 오셔서 사역하시면 누가 감히 그를 인간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고 저버리겠습니까? 모두 땅에 엎드릴 것이니 하나님도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로써 말세에 주님은 성육신으로 은밀히 임하여 사역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연이은 재난은 주의 재림 징조입니다 (2)

  어떤 분들은 아마 말세에 주께서 은밀히 임하여 사역하시면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겠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하나님의 예언은 다 이루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계획적이고 순차적으로 진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은밀히 임하여 인류의 구원 사역을 하신 다음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주의 재림에 관한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8),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한복음 5:22) 이런 구절을 통해 말세에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은밀히 오셔서 인류를 향해 말씀을 선포하시고, 심판하는 사역으로 그의 보좌 앞에 온 사람들을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속 사역의 기초에서 하시는 것으로,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하신 사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으로 죄는 속량받았지만 교만함, 간사함, 이기적 악독함 등의 사탄의 본성은 완전히 해결받지 못해 계속 죄를 범하고 다시 죄를 자복하는 상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세에 다시 성육신하여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의 심판 사역으로 정결함을 받고 환난 전에 이긴 자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은밀하게 사역하는 기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지 않고 말세의 심판 사역을 거부하고 계속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정죄한 사람들은 말세 사역에서 드러난 가라지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통해 모든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착한 종과 악한 종, 진리를 사랑하는 자와 진리를 싫어하는 자를 나눈 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다음 주님은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열방에 보이시며 상선벌악(賞善罰惡)하십니다. 그때면 성육신으로 재림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본인이 대적하고 내쳤던 분이 재림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면서 크게 후회하고 가슴 치며 이를 갈고 슬피 울 것입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예언이 온전히 이뤄지는 것입니다.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계시록 1:7),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3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밀히 오셔서 하시는 말세의 심판 사역을 통해 정결함을 받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주의 재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성경 몇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태복음 25:6),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시록 3:20) 이 구절에서 “밤중에 소리가 나되”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는 내용은 주께서 말세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 주의재림을 증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임을 말합니다. 또한 주님은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을 맞이하시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유의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시록 2:7)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심판 사역을 하신다는 증언을 들으면 더더욱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보고 하나님이 나타나 하시는 사역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아듣는다면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간 것이자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 것이 됩니다.

• 추천 내용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1)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8~13)

  2)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예수가 행한 이적과 기사 중에서 이 두 가지만 골랐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이적과 기사이며, 은혜시대에 예수가 행한 대표성을 지닌 두 이적과 기사다.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개념이냐? 보통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 명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느냐? 일반인의 식사량으로 계산해 본다면, 기껏해야 두 사람이 먹기 충분할 양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에게 주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몇 사람에게 나눠 주었느냐?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해서 오천이라는 숫자는 너무 많지 않으냐? 숫자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이 봤을 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두 숫자의 차이가 너무 커서, 한 사람당 한 입만 먹는다 쳐도 오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가 기적을 하나 행하였다. 그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을 뿐만 아니라 여분까지 있게 하였다.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이적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았고, 하나님은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전능하다는 사실을 목도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는데, 만일 음식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없었을까? 당연히 가능했다! 이것은 이적과 기사였기 때문에,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그 기묘함을 측량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결코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나님께 평범한 일을 왜 여기서 굳이 설명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 기적의 배후에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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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이 오천 명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아보자.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냐? 성경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느냐? 분명 알지 못했다. 최소한 그들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부는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고, 일부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거나 들었을 수도 있다. 소문으로 알게 된 예수에 대해 단지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를 따른다고 할 수도,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예수가 이 오천 명을 보았을 때, 그들은 배가 고파서 그저 배부르게 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는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들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면서 예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저 배만 채우려 하는 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떠했겠느냐? 여기서 예수의 마음과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 및 본질과 관련된다. 그저 한 끼 배불리 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오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 앞에서, 예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한 오천 명 앞에서, 예수는 그저 기적을 통해 그 오천 명에게 은혜를 내려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결코 이 오천 명이 그를 따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를 좇아 왔고 원하는 것은 그저 배를 채우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것이다. 재밌는 구경거리나 기적을 보기 좋아하는 오천 명의 눈을 열어 성육신 하나님이 이룰 수 있는 일을 직접 보게 했던 것이다. 예수는 실제 사건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그 오천 명은 그저 배불리 먹기만 바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상대로 어떤 말씀도, 가르침도 주지 않았으며, 그저 기적을 보여 주기만 했다. 그는 그를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처럼 그 사람들을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그의 주재하에 있다. 그의 시야 안에 있는 피조물이라면, 필요하다 느낄 경우 하나님은 누구든 그의 은혜를 누리게 한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심지어 떡과 물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예수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가지거나 감사하는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데에는 원칙이 있어, 믿지 않는 사람은 보살펴 주지도 지켜 주지도 않고, 하나님의 은혜도 아예 내려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이냐? 하나님은 그가 만든 살아 있는 피조물이기만 하면 다 간수하고 보살펴 주며, 다양한 방식으로 대하고, 배치하고 주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이고 태도이다.

  떡과 물고기를 먹은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들과 따지지 않았다. 배불리 먹이고 난 후,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너희들은 아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가르침이라도 주었느냐?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는 어디로 갔느냐? 성경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기적을 행하고 나서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들에게 어떤 요구라도 했느냐? 그들을 증오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는 절대 자신을 따를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때, 그는 인류의 타락함을 보았고, 인류가 그를 저버렸다고 느껴 마음이 아팠다. 또한, 그 사람들과 함께할 때 보게 된 인류의 우둔함과 무지함은 그의 마음을 아주 슬프고 힘들게 했다. 그래서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도 없었고, 더 상대하거나 정성을 쏟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예수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는 다만 그들을 선대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대하는 그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고 그들을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발현하여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그는 인자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해 주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대하든지, 어떠한 결과가 있든지 간에 그는 창조주의 신분으로 모든 피조물을 대했다. 그에게서 발현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이었다. 예수는 조용히 일을 하고 나서 또 조용히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떤 측면의 성품이냐? 하나님의 자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사심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평범한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할 수 없다!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오천 명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모두가 하나님께 적대적인 자들이라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절대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의 본질은 확실히 하나님께 적대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적대감을 자신의 방식으로 녹여 버렸다. 이 방식이 바로 ‘선대’하는 것이었다. 즉,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봤을지라도, 하나님 눈에 그들은 여전히 피조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죄인들을 선대해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이다. 이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본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네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태도를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을 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과 염려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류에게 들인 정성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너는 두 가지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표현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박애’라고 한다. 이 두 표현 중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적합하지 못하다. 보통 가슴이 넓고 정이 많은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 나는 이 표현을 아주 혐오한다. 이 표현에는 대상도 가리지 않고 원칙 없이 무턱대고 베푼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어리석고 멍청한 자들의 흘러넘치는 감정을 묘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있다. 나는 더 적절한 표현 두 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첫 번째 표현은 ‘더없이 크다’이다. 이 표현에 시적인 느낌이 있지 않으냐? 두 번째 표현은 ‘광대하다’이다. 내가 이 두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함에는 실제적 의미가 담겨 있다. ‘더없이 크다’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면,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 실물은 아무리 커도 사람이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추상적이지 않고 분명 존재하기에,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확실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줄 수 있다. 평면적인 관점에서든, 입체적인 관점에서든,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상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없이 크다’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는 만물이 함께 누릴 수 있고, 또 모든 피조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만물이 그 사랑에서 자양분을 얻어 살아가며, 만물의 생존이 하나님 사랑의 면면을 나타내고, 시시각각 누리는 그 사랑을 헤아리며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측량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비밀을 사람이 가늠하기 어렵고,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는 마음, 특히 인류를 대하는 마음을 사람이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즉, 창조주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창조주가 친히 만든 인류에게 얼마나 깊은 사랑을 쏟았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거나 알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없이 크다’라고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크고 실제적인 그 사랑을 체험하고 이해하며, ‘창조주’라는 말의 실제적 함의를 더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한, ‘피조물’이라는 호칭의 진정한 의미까지 깊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광대하다’라는 표현은 보통 무엇을 묘사하느냐? 큰 바다, 우주 등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면, 광대한 우주, 광대한 바다 등이 그렇다. 사람은 우주의 광활함과 심오함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사람은 끝없이 상상하고 우러러보지만, 그 오묘함과 심오함에 대해 생각만 할 뿐 닿을 수는 없다. 바다를 생각하면, 너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의 광활함을 떠올리고, 그 신비함과 포용력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광대하다’라고 묘사한다.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과 깊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사랑의 능력이 무한하고 광대함을 깨닫게 하고자 함이다. 또한, 하나님 사랑의 성스러움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현되는 하나님의 존엄과 거스를 수 없음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제 너희는 내가 ‘광대하다’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더없이 크다’와 ‘광대하다’로 이렇게 묘사해도 손색이 없지 않으냐? 전혀 손색이 없다! 인류의 언어 가운데 이 두 표현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가장 적절하고, 비교적 근접한데,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이 두 표현을 사용했겠느냐? 분명 너희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너희가 이해하고 체험한 것은 아직 입체적인 공간의 차원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단지 평면적인 범위 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표현이 궁하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알맞은 말도 찾지 못한다. 내가 오늘 말한 두 표현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이해가 얕고, 체험한 범위가 작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께는 사심이 없다고 말했더니 너희는 그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사심 없는 마음’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느냐? 너무 의미가 협소한 표현이 아니냐? 이 문제에 대해 너희는 더 많이 생각해야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첫 번째 이적과 기사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보았다. 몇천 년 이어져 온 이야기들은 간단한 줄거리로 간단한 현상들만 알게 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줄거리 속에서 더 가치 있는 것들을 보았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다.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하나님 자신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낼 때, 마음의 소리도 함께 전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자가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그를 알고 그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이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으로 그와 협력해 그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행했던 이런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무언의 표현이다.

  이어서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 이 구절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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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은 이 구절의 말씀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예수가 행한 이 기적은 위에 언급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죽은 자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이적과 기사는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러한 행사는 그 시대에 아주 큰 의의가 있었다. 하나님이 성육신했기 때문에 사람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그의 실제적이고 미미한 단면만 보았다. 설령 예수의 성격을 좀 알거나 겉으로 보여지는 특색 있는 것을 봤다 할지라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본질이 누구인지,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은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사로의 사건을 증명하고 사건의 진상을 알고자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으냐? 이는 하나님께 있어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특정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신분과 본질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서없이 일하는 법 없이 매사에 계획적이고 절차 있게 일을 해 나간다. 합당한 시기와 기회를 찾아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의 권능과 신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지 않으냐? 성경 구절을 보자.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 나오는데 …”, 예수는 이때,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 주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에 따라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는 제단을 쌓거나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이것을 이적과 기사라고 해야 하겠느냐, 아니면 명령이라고 해야 하겠느냐? 아니면 술법이라고 해야 하겠느냐? 겉으로 보면, 이적과 기사라고 칭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 시대에 적용시켜도 이적과 기사라고 할 수 있다. 절대 혼을 부르는 술법이나 사악한 요술이라고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해서, 이 기적은 하나님의 권능으로는 매우 평이한 사건이자 발현된 매우 작은 부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이자 능력이다.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는 하나님은 육을 떠난 영혼을 저승으로도, 마땅히 가야 할 다른 곳으로도 가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언제 죽고, 죽은 뒤에 어디로 가야 할지는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사람과 일, 사물이나 공간적 지리적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저 그가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만물 생령은 다 그의 주재하에 있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인해 생겨나고 살아가고 또한 소멸한다.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는 것 역시 그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이 지닌 권능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목적은 바로 사람의 생사를 포함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사람과 사탄에게 증명해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하였을지라도, 변함없이 사람이 볼 수 있는 물질세계와 볼 수 없는 영계까지 다스리고 주관하고 있음을 알게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은 결코 사탄이 다스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 함이다. 이것은 하나님 권능의 표출과 발현이며, 또한 하나님이 인류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만물에게 전달하는 방식인 것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부활시킨’ 일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분명하게 알려 주고 가르치는 방식이자 그의 능력과 권능으로 인류에게 교훈을 주고 공급해 주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또한, 비언어적 요소로 인류에게 창조주가 만물을 주관함을 보여 주는 방식이자 인류에게 창조주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실제 행사를 통해 알려 주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무언의 방식으로 인류에게 준 가르침은 영구적이고 영원불멸한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마음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놀라움과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나사로의 부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이 사건이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깊다. 이는 이 일을 잘 아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사를 주관한다’는 깨달음과 이상(異象)을 확고하게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 이러한 권능이 있을지라도,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인류의 생사를 주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을지라도, 이는 결코 그의 주된 사역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의미 없는 일을 행한 적이 없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최고의 보물들이었다. 그는 절대 ‘사람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을 주요하고 유일한 사역 목표나 항목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은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부활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에 충분했고, 예수의 신분을 입증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러한 이적과 기사를 반복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원칙에 따라 일을 한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본업에 힘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사역 취지를 벗어나 일하지 않는다. 그는 그 단계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무엇을 이뤄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엄격하게 사역한다. 만일 타락한 사람이 이런 능력을 가졌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을 알리려고 능력을 과시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어 사람을 통제하고 집어삼키려는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이것은 사탄에게서 비롯된 사악으로, 타락한 성품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이렇지 않다. 그가 일하는 목적은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을 더 많이 깨우치고 이끌어 주기 위함이기 때문에 성경 속에 이러한 사례는 아주 적다. 사례가 적다고 해서 예수의 능력이 유한하거나 그가 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사로를 부활시킨 것은 아주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육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기적을 보이거나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게 가르침과 공급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역을 많이 행하였다.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일은 예수가 직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인 아주 작은 단편적 사건일 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본질 속에 ‘과시’라는 요소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가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이지 않은 것은 일부러 자제하거나 환경적 제약을 받은 것이 아니며, 능력이 부족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 때, 예수는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른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을 포함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말씀으로 이루었다. 명령의 말씀에 의해, 권능의 말씀에 의해 만물이 그대로 생겨났고 일들도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한 말씀과 같이 하나님 자신의 권능과 창조주의 능력을 갖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권능이며, 그 권능은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서 나타나고 육신에 실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권능과 능력은 창조주께 속하며, 창조주가 실체화한 인자에게 속한다. 이 역시 하나님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실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쳐 알게 한 내용이다. 이 주제는 여기까지 나누자. 계속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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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사역

성경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을까?

  답: “성경 외에 더는 하나님 말씀이 없고 성경을 벗어난 거면 이단이다”라고 하는 말은 대체 사실에 부합될까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성경이 책으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그 당시 편집자들의 논쟁과 누락으로 선지자들이 전달한 일부 하나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다는 수록되지 않았어요. 이건 공인된 사실인데 어떻게 성경 외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설마 그 누락된 선지자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까? 신약 성경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그것뿐이 아니죠. 예수님이 하신 대부분 말씀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사역하신 기간에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시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신약 4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한데 모르면 몇 시간 동안 하신 말씀과 대등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3년 반 동안 전도 사역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비하면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합니다. 요한이 말한 것과 같아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25) 이건 예수님의 역사와 말씀도 신약 성경에 다는 기록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니 “성경 외에 더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없다”는 건 사실에 안 맞습니다. 우린 또 알아야 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다 하나님이 한 단계 사역을 마치신 후에 사람들이 기록해서 생긴 겁니다. 최초의 성경은 구약 성경뿐이었고 예수님의 역사든 말씀이든 다 구약 성경을 벗어났어요. 만약 성경을 벗어난 건 이단이라는 논법대로라면 우리가 예수님을 정죄하는 게 아닐까요? 형제자매님, 이런 사실에서 보다시피, “성경 외에 더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말씀이 없고 성경을 벗어나면 이단이다”라는 이런 말은 근거 없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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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방면의 진리에 관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예수 시대에, 예수는 그 당시의 성령이 자신에게서 하는 사역에 따라 유대인들을 이끌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었다. 예수가 행한 것은 결코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역에 따라 말씀하였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든, 예수는 성경 속에서 길을 찾아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이끌지 않았다. 예수는 사역을 막 시작했을 때에는 회개의 길을 전했다. 그러나 ‘회개’라는 이 두 글자는 구약의 그렇게 많은 예언 중에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다. 예수는 성경을 근거로 사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었고 더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예수는 성경을 참고하여 전도한 적이 없었다. 율법시대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예수의 사역, 예수의 교훈, 예수의 권병 역시 율법시대에 아무도 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저 자신의 더 새로운 사역을 했을 뿐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성경으로 예수를 정죄하고, 구약 성경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지만, 예수의 사역은 오히려 구약 성경을 초월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어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예수의 교훈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다 구약에 전혀 기록된 적이 없었던 연고가 아닌가? ……사람이 보기에 예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역하였고, 또한 그 사역은 성경 기록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런 것은 다 사람의 잘못과 그릇됨이 아닌가? 하나님이 역사하는데, 규례에 맞출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역사하는데,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야 하는가? 도대체 성경이 큰가, 하나님이 큰가? 왜 하나님은 역사할 때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가? 설마 하나님에게는 성경을 벗어날 어떤 권리도 없단 말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떠나 따로 역사할 수 없단 말인가? 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는가? 예수가 안식일에 따라, 구약의 계명에 따라 실행한다고 하면, 예수는 왜 안식일은 지키지 않으면서 발을 씻겨 주고 수건을 쓰며 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셨는가? 그런 것은 다 구약에 없는 계명이 아닌가? 예수가 구약대로 한다면, 왜 그런 규례들을 타파했겠는가? 너는 하나님이 먼저였는지, 성경이 먼저였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안식일의 주인만 되고 성경의 주인은 될 수 없는가?』 (<성경에 관한 논법 (1)>에서 발췌) 오랜 세월 우리는 성경을 떠나면 이단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역사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성경을 참고하지도 않으며 더욱이 성경에서 길을 찾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이끄는 게 아니라 성경의 범위에서 벗어나 더 새로운 사역을 하여 사람에게 더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는 겁니다. 형제자매님, 하나님은 만물의 주재자이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또한 성경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계획과 당시의 인류의 필요에 따라 더 새로운 사역을 하실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성경 외에 더는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없고 성경을 떠나면 이단이다”라는 이런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앞 두 단계 역사의 실제 기록으로, 구약 성경에 기록된 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서 하신 율법시대 사역인데 바로 우리가 늘 말하던 하나님의 율법시대 역사입니다. 성경 신약전서는 예수님이 은혜시대에서 역사하신 실제 기록인데 바로 우리가 늘 말하던 하나님의 은혜시대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시대 사역을 하실 때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셨고 은혜시대의 사역을 하실 때도 성경에 근거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하신 모든 사역은 성경에 근거한 게 아닙니다. 사람의 사역이나 사람의 설교, 섬김을 가늠할 때는 성경에 근거해도 괜찮지만 그렇다고 전부 성경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성령의 깨우침이 있는지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늠할 때 성경에 근거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바리새인과 같죠. 그들의 사역은 성경에 부합되었어도 성령 역사가 없었는데 그런 섬김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사역이 아무리 성경에 부합되어도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 역사를 대적한 자들이고 하나님께 정죄받은 자들입니다. 설마 이런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시죠?

영화 대본 <성경의 비밀을 밝히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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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약속

 신앙 문답

실적에 얽매여 괴롭고 우울한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자유

    2018년 3월 19일 월요일 맑음

  오늘은 새로운 회사에 정규직으로 출근하는 첫날이다. 너무 기쁘다! 정시에 집을 나와보니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돌이켜보니, 3개월 전 고민 끝에 이 회사를 선택한 후 출근 첫날부터 지금까지 다 순조로웠다. 3개월 동안의 고생과 노력으로 마침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제는 매출액에 따라 월급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니 단단히 벼르게 되었다. 가게에 도착하니 동료가 손님들과 열심히 상담을 하고 있었다. 속으로 ‘이 동료랑 앞으로 한 가게에서 같이 일하는데 어떻게 주문을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센 편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미리 제대로 물어보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받은 주문을 뺏겨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난 고생스럽게 일만 하고 실적이 없으니 손해가 아닌가. 그럴 순 없다.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점장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점장은 돌아가면서 주문을 받자고 했고, 동료도 흔쾌히 승낙했다. 나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2018년 3월 25일 일요일 작은 비

  요 며칠 기분이 정말 답답하다. 똑같이 주문을 나눠 갖기로 해놓고선 동료는 번번이 내 주문을 뺏어갔다. 동료의 행동에 불만스러웠지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조금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와 다퉈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포용하고 인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래서 처음에는 동료가 주문을 뺏어가는 일에 대해 시시콜콜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어떤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는데 동료는 상대가 부자인 줄 알고 얼른 다가가서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뭐지?’ 왜 또 주문을 뺏어가는 거야? 아! 나는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얼마 전에 점장이 내가 잘하고 있다며 칭찬하고 날 점장 보조로 뽑아주었다. 게다가 매달 남모르게 200위안(한화 약 3만 2천원)을 더 얹어주었다. 하지만 동료가 이렇게 내 주문을 뺏어가니 점장과 본점에서 내 실적이 나쁜 것을 보면 나에게 업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이 점장 보조를 어떻게 맡겠는가? 저녁에 나는 걱정으로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계속 낮에 동료가 내 주문을 뺏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동료가 주문을 뺏어갈 때 우쭐대던 모습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계속 양보할 수 없다. 그랬다간 월말 실적 결산 때 내가 꼴찌를 차지할 것이다. 내일 출근하면 눈 크게 뜨고 잽싸게 움직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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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3월 28일 수요일 작은 비에서 중간 비로 바뀜

  요 며칠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 내 기분도 답답하다. 가게에서도 저기압이 머리 위를 누르며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울적한 기분이었다. 왜 인지 모르지만 요즘 나는 매일 손님이 찾아오길 기다리는데 주문을 받고 싶을수록 받지 못하고 있다. 주문을 받더라도 다 작은 주문이었다. 나와 동료는 이미 며칠째 대화하지 않고 있다. 말해야 할 때도 내키지 않아 딱딱하게 몇 마디 나눌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출근하면 우울하고 퇴근하면 피곤해지는 등 너무 힘들다.

  오늘 아침, 동료가 또 나의 한계에 도전했다. 내가 막 주문을 받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조금도 거리낌없이 이 주문의 실적을 그녀의 이름으로 올렸다. 나는 정말 화가 나서 콧구멍에서 연기가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점장에게 이야기해 내 몫을 찾아오기로 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갑자기 혈기로 사람과 다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이 일에 화내지 말고 냉정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퇴근 시간까지 버티었다.

  집에 도착한 후, 그동안을 돌이켜보았다. 혼자서 참고, 양보하고, 겉으로는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는 동료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 나와 스스로 반성하지 않았는데, 설마 나에게는 문제가 없을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은 분명 내가 배워야 할 과제가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의 꿈이 얼마나 원대하고 소망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정당하든, 사람이 실현하려는 것과 추구하려는 것은 두 글자를 떠나지 못한다. 그 두 글자는 사람의 일생에서, 각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것 또한 사탄이 사람에게 주입시키려는 것이다. 어떤 두 글자일까? 하나는 ‘명(名)’이고 다른 하나는 ‘리(利)’이다. 즉, ‘명예’와 ‘이익’이다.…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명예와 이익을 위해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앞날과 운명까지 기꺼이 다 사탄에게 맡기게 되었는데도 전혀 의심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전혀 되찾아 올 줄도 모르고 있다. 사람이 사탄에게 그렇게 의탁하고 충성을 바치고 나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그럴 수 없다. 사람은 철저히 사탄에게 통제되고 완전히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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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구절이 지금 나의 실제 모습이 아닐까? 그동안을 생각해 보니, 나는 명리를 다투는 삶을 살았다. 이익을 위해 동료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옥신각신 다투었다. 동료가 내 주문을 빼앗아 가기 시작할 때 나는 화를 내고 점장에게 고발하려고 하고, 마음속으로 그녀를 밀어내며 반감을 가졌고 그녀가 제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다. 나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내가 어떻게 빼앗아올까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다가 주문 받는 기회를 놓쳐버릴까 봐 가게 입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손님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달려갔다. 동료가 바쁠 때도 도와 주기 싫었다. 실적이 오르면 나는 부와 명예를 함께 거머쥘 수 있다. 점장과 본점에서 내 업무 능력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과급과 보조금도 받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러면서 점장 앞에서는 능청스레 말했다. “제가 계속 그녀한테 양보하지 빼앗지는 않아요.” 지금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명예’와 ‘이익’의 속박에 단단히 갇혀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전의 고통이 다 사탄이 명리를 이용해 사람을 속박하고 타락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을 돌이켜보니, 나는 ‘사람이 자기를 위하지 않으면 하늘이 멸망시킨다’라는 사탄의 생존 법칙에 의해 살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아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 제가 일하는 동안 동료가 저의 주문을 빼앗든지 말든지 저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의 마음을 지켜주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실적을 올리고, 명리를 위해 다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2018년 4월 19일 목요일 흐림

  저녁 무렵, 나는 단골 손님 한 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가가 인사했다. 동료도 이 손님이 큰손이라는 것을 듣고 다가와 이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오늘 간신히 겨우 큰 주문을 받나 했는데, 이 사람이 또 끼어들다니, 얼굴이 어쩜 그렇게 두꺼울까? 동료가 손님에게 계속 소개하는 것을 보고 답답하면서도 ‘이 손님을 뺏어와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투며 빼앗다가는 이 주문을 받지 못할 수도 있어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괴로웠지만 속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 나의 혈기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고, 기도한 후에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이때 나는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네가 포기하고 내려놓을수록 마음이 더 평안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점점 커지며 너의 정형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네가 겨루고 빼앗을수록 너의 정형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질투심과 미워하는 마음도 더 커지며 더 얻고 싶어진다. 얻고 싶어할수록 얻지 못하고, 얻지 못할수록 너는 더욱 미워하게 되며, 미워할수록 너의 안이 더 캄캄해지고, 캄캄해질수록 너는 본분을 잘하지 못하게 되며, 본분을 잘하지 못하면 점차적으로 너를 쓰지 않게 되고 너는 도태된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의 고리인데 믿지 못하겠다면 네가 시험해 봐라! 네가 이런 정형을 되돌리고 싶어하고 이런 것에 통제받지 않으려 한다면 너는 반드시 먼저 내려놓고 먼저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나는 마음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탄은 명리로 나를 구속해서 내가 명리를 다투며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롭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명리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포기하고,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는 너그럽게 앞으로 가서 그녀가 손님 접대하는 것을 함께 도와주니 뜻밖에도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나중에 동료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나에게 말했다. “내가 그 손님의 주문을 받았지만 완전히 내 실적으로 계산할 수 없어요. 일부는 당신이랑 나눠야 해요. 나중에 큰 주문을 받을 때도 같이 나눠요.” 180도 바뀐 동료의 모습에 나는 순간 반응하지 못할 뻔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실행할 때, 사람과 명리를 다투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해방될 뿐만 아니라 동료와의 사이에서 이해와 신뢰도 높일 수 있고, 자신과 사람, 그리고 업무에서도 이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8년 4월 30일 월요일 흐리다가 갬

  오늘 점장이 우리의 실적을 통계할 때 동료의 실적이 나보다 좋다는 것을 들었다. 고개를 돌려 동료의 득의양양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했고 동료에게 계속 주문을 양보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얼른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지켜달라고 기도드렸다. 더 이상 명리를 다투며 살면서 명리의 구속을 받고 살 수는 없었다. 기도를 드린 후 마음은 점차 평안함을 얻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

이익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에게 있어 이익은 생명인 것이기에 이익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하는 법, 배반하는 법, 고난받는 법, 아파도 버릴 줄 아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괴로워도 참으며 조금 포기하게 된다면, 너는 조금은 홀가분하게 느껴질 것이고, 조금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이긴 것이다 … 영원한 이익이란 없다. 지위도 체면도, 돈도 물질도 다 잠시적인 것이다. 사람이 그런 방면의 성정을 해결해 진리를 얻고 구원을 받았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귀히 여김 받는 사람이 된 것이다. 또한, 사람이 얻은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사탄은 물론, 그 어떤 사람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했어도 반대로 진리를 얻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 그것 역시 너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도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얻은 것이다. 진리 실행을 선택한 사람은 가장 명철한 사람이다. 자신을 보전하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줄 모르고 이익을 얻기 위해 진리를 포기하기로 선택하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가장 기본적인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사실 눈앞의 이런 이익과 체면은 일시적인 것이고, 진짜 소중한 것은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리는 하나님의 생명, 속성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원칙과 방향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의지하여 살아갈 때 진정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또한, 명리는 사탄이 사람을 속박하는 도구이다. 우리가 명리를 위해 살면 사탄에게 우롱당해 말할 수 없이 괴롭다. 이런 것들을 내가 모두 직접 체험했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해야만 정말로 똑똑한 사람이다. 마치 욥이 시련을 받았을 때, 온 들과 산의 소와 양이 다 사탄에게 약탈당했지만 그는 사람을 보내 뺏어오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했다. 또한 이런 말을 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기 1:21) 욥은 이 말로 하나님은 증거할 수 있었고, 사탄은 듣고 도망쳤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에게 복에 복을 더해주셨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셔서 그가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욥을 본받아서 다투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익을 내려놓고, 진리를 구하는 똑똑한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짝 열린 창문처럼 내 마음을 환히 밝혔고 나아갈 방향도 생겼다.

  2018년 5월 6일 일요일 맑음

  오늘은 쉬는 날이다. 날씨가 맑아서 기분도 좋았다. 요 며칠을 생각해보니, 동료가 주문을 받고 싶어 할 때마다 내가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양보했었다. 겉으로는 내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얻었다. 적어도 나는 매일 이익의 득실을 따지며 고통스럽게 살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진리를 행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많이 벌고 적게 버는 것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내가 다투고 빼앗을 필요가 없다. 내가 이렇게 할 때마다 마음에 특별한 평안을 느꼈다! 또한 예상밖으로 점장은 매달 점장 보조의 월급으로 200위안을 보조해 주셨다. 동료도 전처럼 그렇게 주문을 뺏어가지 않았다. 요 며칠 나는 또 큰 주문을 연달아 2건 받아서 동료와 실적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동료와 협력해 또 많은 주문을 받았다. 우리는 점점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니 하나님과의 관계도 점점 정상적으로 되었다. 더는 점장과 본점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나는 매일 마음의 기쁨과 해방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번 인도하셔서 나는 사탄의 명리의 속박으로부터 점차 벗어났고, 사람들과 더 이상 옥신각신 다투며 힘들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면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정당당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박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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