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

길 잃은 양의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이것은 비유이다. 이 구절의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여기에서 비유의 표현 방식은 인류 언어에 있는 수사법의 일종으로, 인류의 지식 범주 안의 것이다. 만일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했다면, 사람은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은혜시대에 인자가 한 것이라 사람들은 아주 편하고 따뜻하며, 친근하게 느꼈다.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그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다. 이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대표하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했던 사역을 대표하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대표한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양으로 비유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때 성육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역하는 한 가지 원칙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로 당시 사역에 대한 결심과 태도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우월함’이다. 즉, 그는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에게 말하고, 그의 뜻을 표현했다. 심오해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하거나 ‘번역’해 준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그의 뜻과 그가 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또 사람의 눈높이에서, 사람의 언어로, 그리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었다. 나아가 사람의 언어와 지식으로 말씀하고 사역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친근하고 가까이할 수 있는 존재로 느꼈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데에 금기가 있느냐?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언어나 대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과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뜻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를 이용했으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실함과 진심, 그 기간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았다. 이 비유는 율법하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또한 대대로 은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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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 자신이 말한 것이냐,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말씀한 것이냐? 겉보기에는 예수가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이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말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그 말을 보충해야만 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예수의 성품을 드러냈다. 성육신하든 영계에서 사역을 하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보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던 문제, 즉 인자가 하는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전제를 추가해야만 말씀의 성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씀의 정확성을 믿게 함으로써 말씀의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가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인자의 처지가 얼마나 난감했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가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나 미미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말씀으로 ‘절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자리한 그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메시지를 사람에게 전해 준 것이었다. 이 말이 사람에게 주는 풍자적 의미가 크지 않으냐? 성육신으로 사역하면 하나님의 본체에 없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가질 수 있었지만, 사람에게 의심받고 버림받는 것을 참아야 했으며, 또한 사람의 무감각과 둔감함을 감내해야 했다. 인자의 사역 과정은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또한 사람이 그와 겨루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고,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속성과 본질로 끊임없이 사람의 신뢰를 얻고, 계속 사람을 정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탄과 실제로 전쟁을 했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과 지략 대결을 펼쳤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낮춤으로써, 자신의 속성과 사랑과 지혜로써 사역을 완성하였으며, 얻고자 한 사람을 얻었다. 또한 그에게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를 얻고 그의 보좌로 ‘돌아간’ 것이다.

   추천 내용 :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신앙 일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비결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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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27일 구름 많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의 생명의 대가로 우린 죄 사함을 받았다. 나는 그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주 죄를 지었다.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죄를 자백하는 삶을 살다 보니, 사는 게 정말 괴로웠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죄를 이겨낼 능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나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죄를 짓는 문제는 줄곧 해결하지 못했다.

    2017년 11월 1일 구름 많음

    주님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며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태복음 22:37~39)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동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이 말씀을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때로는 집에서 사소한 일로도 아내와 말다툼했다. 교회에서 내 체면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면 속으로 괴롭고 기분이 나빠져 형제자매에게 선입견이 생겼고, 그들과 상대하기 싫을 때도 있었다. 봉사를 할 때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아! 사실 나도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항상 주님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최대한 자제하고, 형제자매님들과 서로 사랑하고, 내 행동을 최대한 단속하고, 인내하고 포용하며, 다투거나 싸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사람에 대한 질투와 선입견이 항상 나타났고, 억제하려고 해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항상 어쩔 수 없이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죄를 자백하는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문제로 나는 무척 괴로웠고, 이대로 살다 가는 주님이 오실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늘 성경을 찾아봤지만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여러 번 나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항상 어떤 힘이 내 안에서 포기하지 말라고 나를 지탱해주었다. 주님은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누가복음 11:9)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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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8일 흐림

    오늘 성경을 읽을 때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을 보았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내가 전에 여러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처럼 내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없었다. ‘나는 늘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사소한 일로 가족들과 언쟁을 벌이고, 형제자매님들과도 마음속으로 다퉜다.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있는 나는 확실히 ‘정결케 되지 못했구나!’ 오랜 세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겉으로는 전도하며 수고하고 봉사했다. 하지만 나는 죄 인줄 알면서도 죄를 짓고, 죄를 지으면, 또 죄를 자백했다. 이것은 공공연하게 주님께 반항하고 거역하는것이 아닌가?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이끌려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는 몇몇 동역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에게서 답을 얻고 싶었지만 뜻밖에도 리 형제님 역시 나랑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 자매님은 강조하며 말했다. “주님은 자애롭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어요. 우리가 항상 죄를 짓더라도 주님은 모두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왕 자매님도 장 자매님의 관점을 인정하며 말했다. “요한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항상 죄를 짓지만 주님께 죄를 자백하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면 주님은 우리가 치른 대가를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마음이 약간 편안해졌다. 내가 주님 앞에서 죄를 잘 자백하고, 전보다 더 열심히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고 대가를 치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죄를 짓는 일로 더 이상 자책하지 않게 되었다.

    2017년 11월 13일 구름 많았다가 개임

    오늘 아침, 주님께 간절히기도를 드린 후 평소와 다름없이 성경을 펼치고 영적 수련을 시작했다. 아래의 계시록 말씀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무엇이든지 속된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시록 21:27) 성경에서 정결케 되지 못한 자는 그 성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성’은 천국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보아하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또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을 보았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두 구절의 말씀을 본 후 나는 매일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항상 죄를 짓고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지 못하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주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나를 떠올렸다. 나도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는데, 그럼 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요한1서 1장 9절에서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정결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째서 이 위에서 말한 성경 구절과 다를까? 나는 이 세 구절의 말씀을 펼쳐 놓고 대조한 결과, 계시록 21장 27절 말씀과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이 모두 같은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도 자연히 분명하게 드러났다. 요한1서 1장 9절에서 말씀하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나는 이 말씀을 반복적으로 묵상했다. 이 말씀은 죄에서 벗어나, 정결케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우리의 죄가 주님께 사함 받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정결케 되는 것과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개념이다. 우리는 전에 성경의 말씀을 오해해서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정결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죄 속에 살면서도 자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렇게 사는 것이 더 타락한 것이 아닌가?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1:15~16)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이 두 구절을 통해 만약 우리가 낮에 죄를 짓고, 밤에 죄를 자백하는 생활을 한다면, 결국에는 정결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자격도, 천국에 들어갈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더럽고 타락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훗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련된 큰 일이다. 다음 주에 있을 성경 읽기 모임에서 반드시 이 문제를 내어놓고 다 같이 연구해 봐야 한다. 영적 수련이 끝나고, 나는 주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예수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합니다. 우리는 정말 부패하고 타락해서 주님의 얼굴을 뵐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죄를 짓고 회개하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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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1월 25일 맑음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요즘 나는 기분이 좋다. 친구가 나에게 영적 서적을 한 권 선물해 주었고, 그 영적 서적에 있는 많은 진리도 함께 나누며 그 동안의 미혹감과 당혹감을 풀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았다. 『너는 예수가 말세에 강림할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떻게 강림하는가? 너희 같은 죄인은 이제 갓 구속되었을 뿐, 변화의 과정과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과정은 거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너 같은 옛 사람을 예수가 구원해 온 것은 틀림없다. 또한 네가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죄가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네가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너는 속이 여전히 더럽기만 하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임하고 싶어 하는데, 그렇게 좋은 일이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 과정이 하나 빠졌는데, 구속되었을 뿐 변화되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구속만 되었을 뿐 거룩하게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과 더불어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 중의 한 단계, 바로 변화되고 온전케 되는 가장 중요한 한 단계가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갓 구속받은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기업을 곧바로 이어받을 수 없다.』 이 말씀을 보고, 친구와 나눴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졌다. 원래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일 뿐, 사람을 정결케 하고, 변화시키는 사역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위해 길을 닦은 것이었다. 이를 통해 나는 예수님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항상 죄악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질투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무시한다. 누가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속으로는 증오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기뻐하고,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원망한다. 항상 남에게 이득을 보려고 하고, 손해를 보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를 짓고, 죄를 자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이런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다. 마치 사도 바울이 한 말처럼 말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 이와 같이 만약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사람을 정결케 하고, 변화시키는 사역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든지 죄를 짓고,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따르고, 죄악의 즐거움을 탐하며, 전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죄를 짓고 자백하기만 할 뿐 진리를 행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평생 동안 믿었던 사람, 또는 성경을 숙독하고, 학식과 경륜이 풍부한 종교 지도자라할지라도 죄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주옥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계속 봐야 겠다!

    2017년 11월 28일 흐렸다가 개임

    저녁 무렵,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나는 서재에 앉아서 계속 그 책을 읽었다.

    그 책 속에서 나는 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았다. 『사람은 하나님의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사탄의 타락된 옛 성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성이 완전히 벗겨지고 더 이상 발전되지 않도록 사람을 사탄의 타락 성품에서 완전히 구원해 내어 사람의 성품이 다 변화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에게 생명이 자라나는 길을 알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성품 변화의 경로를 알게 해야 하며, 또한 이 길을 따라 실행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성품을 점차 변화시켜 빛 비춤 아래에서 살게 해야 하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 또한 사람에게 사탄의 타락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철저히 죄 속에서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알고 보니 내가 죄를 짓는 근원은 모두 사탄의 타락 성품이 내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있고, 하나님의 얼굴을 뵐 자격이 있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1장 5절 말씀과 같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예전에 나는 우매하고 눈이 멀었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도 깨닫지 못했다. 오직 자신의 관념과 상상만 고수하며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으니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보니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면 결국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바로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같다.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는 내 나라에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더러운 사람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네가 비록 많은 사역을 하였고 수년간 사역하였지만, 마지막에 가서도 여전히 더럽고 추하기 짝이 없다면, 내 나라에 들어가려는 것은 천리(天理)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부터 오늘까지 나는 나에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접근하려는 어떤 사람에게도 편의를 봐준 적이 없다. 이것은 천상의 법칙으로, 아무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를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은 긍휼이시고 자애로우시다. 동시에 공의로우시고 성결하신 거룩한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의 죄성이 정결케 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꿈은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니 푸른 하늘이 보인다.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다만 구원을 받았지만 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말세 구원의 은혜를 찾고 받아들여야 겠다. 그래야 정결케 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계시록의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시록 21:27)라고 하신 말씀과 같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어떻게 해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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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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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정말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전부 완성되었다는 의미인가?

    목사님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전부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고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재림하시면 우리를 끌어 올려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다시 구원 사역을 하실 리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끝난 것을 의미하는지, 주님이 돌아오시면 정말 더는 아무 사역도 하지 않으시는지에 관해 물음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했으며, 계시록 2장 7절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는 예언과 말세에 주께서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착한 종과 악한 종을 갈라 놓으러 오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을 근거로 주께서 오시면 진리를 선포해 심판 사역을 하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각 사람을 부류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언들이 다 이루어지고 성취되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다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의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설마 주님의 말씀이 수포로 돌아갈까요?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전부다 끝난 게 아니라면, 무엇을 가리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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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는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함

    여기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가 당시에 행한 사역은 전 인류를 속량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믿으면 죄 사함 받을 수 있었다. 그를 믿는 자는 속량받았고, 죄에 속하지 않고 벗어났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모두 조금씩 벗어 버려야 한다. 구원을 얻었다 함은 예수에게 온전히 얻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속하지 않고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죄에 속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보기에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하나님의 성육신 사역을 끝낸 것이고, 온 인류를 속량한 것이며, 음부의 열쇠를 가진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은 부족함 없이 완성되었다고 여겼다. 사실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가 작은 부분의 사역만 완성했을 뿐이다. 그는 인류를 속량하였을 뿐 정복하지는 않았고, 사람의 사탄과 같은 추한 몰골을 바꾼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성육신한 몸은 죽음의 고통을 겪었으나 이는 내가 성육신한 목적이 아니다. 예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나의 사역 중 일부만 완성하였을 뿐 모든 사역을 완전히 끝낸 것은 아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은 구속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전체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시대 말기, 우리 인간은 사탄에 의해 더 심하게 패괴되었습니다. 따라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해 율법에 의해 정죄받고 죽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이런 인류가 멸망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은 친히 말씀이 육신 되어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그의 앞에 나아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죄를 자복하면 용서를 받았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자격을 받았습니다. 더는 율법에 의해 정죄받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실질적 의미이자 구속 사역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죄의 모양이라도 버리며 착한 행실을 조금 행할 수는 있게 됐지만 죄성(罪性)이 철저히 정결함 받지는 못했습니다. 즉, 교만함, 이기적, 비열함, 간교함, 음험함, 악독함, 탐욕스러움, 사악함 등의 사탄의 패괴 성품은 여전히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가 늘 죄를 범해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 지위에 위태로운 상황이 생기면 수시로 거짓말을 하며 남을 속입니다. 둘째,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탐심과 악한 마음을 먹게 됩니다. 또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면 시기, 질투하고 미워합니다. 넷째,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에서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타인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주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이방인들처럼 세상의 시류를 좇아 재물을 탐하고 허영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나아가 자기 원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심하면 주께 맞서고 대적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는 등등의 상태를 보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위기 11:45)라고 하셨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므로 천국에 더러운 자가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늘 죄를 범하며 주께 맞서는 존재에게 과연 주의 얼굴을 볼 자격과 천국에 갈 자격이 있을까요? 진정 구원을 입어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하나님은 또 한 차례 구원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역을 통해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철저히 구원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그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야 우리는천국에 갈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세의 심판 사역을 끝내셔야 진짜 ‘다 이룬 것이다’

    말씀을 더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처럼 이제 막 속량된 죄인들은 변화의 과정과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지금의 너같이 고루한 사람을 예수가 구원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네가 죄에 속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게 죄와 더러움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네가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성결해질 수 있겠느냐? 네 안에는 여전히 더러움으로 가득하며, 너는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강림에 함께하기를 원하느냐? 그런 꿈 같은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한 단계의 과정이 빠졌다. 너는 그저 속량되었을 뿐, 변화의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하나님이 친히 사역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속량만 될 뿐, 성결해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너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에서 한 걸음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와 온전케 되는 중요한 한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속량된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유업을 곧바로 이어받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죄 사함을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탄의 패괴된 옛 성품 안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사람을 사탄의 패괴 성품에서 완전히 구원해야 한다. 죄성을 완전히 벗겨 버리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게 하여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생명이 자라나는 길과 생명의 도,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을 알게 해야 하고, 그 길을 따라 실행하게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성품의 변화를 받고 빛 비춤 아래에서 살게 해야 한다. 아울러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하고, 사탄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해야 하며,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죄에서 완전히 나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이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이다. … 사람은 속죄 제물로 인해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십자가 사역이 끝났고 하나님이 사탄을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안에는 패괴 성품이 아직 존재하며 사람이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를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번 사역은 말씀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을 들추어내어 적합한 길을 따라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은 이전 단계의 사역보다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성과도 더 크다. 지금은 말씀으로 직접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해 사람의 성품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더 철저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성육신으로 하나님이 성육신한 의의를 완전케 하였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확실히 완성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 두 단락을 보면, 말세에 예수님이 돌아와 왜 심판 사역을 하셔야 하는지, 나아가 심판 사역으로 이어지는 성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패괴 성품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패괴 성품의 매임에서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주께서 오시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 우리의 패괴를 들춰내고, 패괴 성품을 벗겨 버리며, 우리를 성품 변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말씀 속에서 자기 자신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실태와 자신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본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공의롭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고 그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탄에 의해 심히 패괴된 자신을 보고 뉘우치고 한탄하며,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하나님의 요구대로 사는 사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계속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과 시련, 연단을 받으면, 우리의 양심ㆍ이성ㆍ인격ㆍ존엄성 등의 정상적인 인간성이 점차 회복되고, 패괴 성품도 조금씩 정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때, 하나님은 재난을 내리시며 상선벌악을 시작하십니다. 사탄의 부류는 대재난 속에서 파멸당하고, 그 후에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인류에게 나타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땅에 나타나고 세상에는 더 이상 눈물과 슬픔과 사망이 없고,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때면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철저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즉, 계시록에서 말한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계시록 21:5)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계시록 21:6)라는 예언이 다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라고 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급선무는 주께서 돌아와 하시는 말씀을 찾아 말세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태복음 25:6) 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돌아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심판 사역을 한다고 전하는 메시지를 들으면, 얼른 알아보고 찾아봐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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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이 예수를 대적한 근본 원인을 알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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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을 따르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알고 있듯이, 당시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유대교 바리새인은 미친 듯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를 저질렀고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저주도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동역자들과 여러 차례 나눠봤지만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믿은 한 설교자를 만나서 인내심 있게 나누고 나서야 저는 이 부분의 진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관건적인 시각에 이 부분의 진리를 알게 되어 우리가 바리새인이 갔던 길을 가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진실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저의 깨달음인데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인의 본성은 교만하고, 완고하며, 진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보았습니다. 『너희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대적한 근본 원인을 알고 싶은가? 바리새인의 본질을 알고 싶은가?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환상이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것만 믿으며 생명과 진리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생명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리석고 완고하고 무지한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메시아를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이 예수를 대적한 것은 성령 역사의 방향을 알지 못한 까닭이고, 예수가 한 진리의 말씀을 인식하지 못한 까닭이며, 더욱이 메시아를 알지 못한 까닭이다. 메시아를 본 적도, 메시아와 함께 지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란 이름을 헛되이 지키며 온갖 수단으로 메시아의 본질을 대적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 바리새인들의 본질은 완고하고, 교만하며,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원칙은 ‘가르치는 진리가 아무리 높아도, 권능이 아무리 커도, 메시아로 불리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아니다’는 것이다. 그들의 그런 관점은 매우 잘못되지 않았는가? 너무나 황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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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락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적한 본질을 남김없이 다 드러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만하고 강퍅한 본성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를 자신의 상상과 관념에 규정하고, 성경의 규례와 글귀 안에 가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영접할 때, 그가 얼마나 높은 말씀을 이야기하고,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는 상관하지 않고, 예언의 글귀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메시아라고 부르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틀리다는 이유로 힘껏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역을 하셨고, 진리를 선포하셨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릇 겸손히 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오실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무릇 예수님의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곳곳에서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예수님의 약점을 잡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0:1~8),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누가복음 22:1~2)

    바리새인의 여러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고, 진리를 대할 때도 전혀 구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완고하게 관념과 상상을 지키고, 예수님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진리를 증오하고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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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그들의 지위와 밥줄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하시는 동안 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시며,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소경이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온 유대땅을 크게 뒤흔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역의 사실을 전하였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중 대다수는 모두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에 권세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으로 만약 예수님이 계속 이렇게 사역한다면 유대교의 신도가 금세 예수님을 따라가 유대교 전체가 머지않아 무너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밥줄을 지키려고 힘껏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며, 헛소문을 퍼뜨려 모함했고, 당장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해서 한스러웠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한복음 11:47~48),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한복음 11:53) 여기서, 그들이 자신의 지위와 밥줄을 지키려고 정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결국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날이 어두워지고 땅이 크게 흔들려 성전 안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3일 후에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고 죄를 자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본래보다 더욱 심하게 미쳐 날뛰면서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병사를 매수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거를 하게 했고, 예수님의 제자를 잡아들이고 박해했습니다. …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바리새인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본질은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고, 예수님의 사역을 파기하려고 망상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유대인을 장악하려는 야심과 욕망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근본 원인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말세에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때, 우리는 또다시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으면 안 됩니다. 완고하고, 교만하며,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대로 주님의 재림을 규정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든지, 우리는 성경의 글귀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바리새인이 메시아의 이름을 헛되이 지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했던 잘못을 또다시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는 일에서 분명 한 가지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 16:12~13)

    성경 계시록의 예언에 여러 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시록 3:6) 그래서 진리가 선포되면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면 분명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앞으로 들림 받고,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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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너희 마음과 영을 찾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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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마음에는 크나큰 비밀이 존재한다. 그러나 네가 빛이 비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왔기에 여태껏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너는 마음과 영을 악한 자에게 빼앗겼다. 너의 두 눈은 어둠에 가려져 하늘의 태양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지 못하며, 너의 두 귀는 거짓된 말에 막혀 여호와의 천둥 같은 음성과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물소리를 듣지 못한다. 너는 가지고 있어야 할 모든 것과 전능자가 너에게 베푼 모든 것을 잃고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 빠져 스스로를 구원할 힘도 없고, 살아서 돌아갈 희망도 없다. 그저 발버둥 치며 정신없이 돌아다닐 뿐…. 그 순간부터 너는 악한 자에게 시달릴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전능자의 축복과 공급에서 멀어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었다. 천만번 불러도 너의 마음과 영을 깨울 수가 없다. 너는 악한 자의 손에서 깊이 잠들었고, 그의 꼬임으로 끝없는 나락에 떨어져 방향과 이정표를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너는 원래의 순진무구함을 잃고, 전능자의 보살핌을 피하기 시작했다. 악한 자가 너의 마음속에서 네 모든 것을 조종하며 너의 생명이 되어 너는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거나, 피하거나, 의심하지 않게 되었고, 그를 마음속의 하나님으로 삼아 섬기고 숭배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너는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또 너는 전능자가 낯설게 느껴지고, 그의 근원과 그가 네게 행한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너는 그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을 적대시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한다. 전능자의 공급을 받은 날부터 너는 악한 자와 동행해 왔고, 수천 년 동안 그자와 함께 풍파를 겪으며 네 생명의 근원이었던 하나님께 같이 ‘맞섰다’. 그러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자신이 파멸에 이르렀음은 더더욱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너는 악한 자가 너를 유혹하고 괴롭혔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의 근원을 망각한 채 오늘날까지 그 악한 자에게 잔인하게 짓밟혀 왔다. 마음과 영이 마비되고 부패한 너는 더 이상 세상의 번뇌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전능자의 존재 여부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너는 오래전부터 악한 자를 친아버지로 여기고, 그를 떠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네 마음속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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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틀 무렵 동쪽에서 샛별 하나가 반짝였다. 지금껏 없었던 그 별은 고요한 별하늘을 밝게 비추고, 꺼져 있던 사람들 마음속의 등불을 환히 밝혔다. 그 등불은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고, 너와 그를 밝게 비추었다. 그러나 너는 여전히 그 칠야 속에서 깊이 잠들어 음성을 듣지 못하고, 빛을 보지 못하며, 새 하늘과 새 땅,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네 아버지가 너에게 “얘야, 일어나지 말거라. 아직 때가 이르잖니. 날씨도 몹시 추우니 밖으로 나가지 말아라. 나갔다가는 칼과 창에 눈이 찔린단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너는 네 아버지만 옳다고 믿고, 그가 너보다 연장자이며 진심으로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그의 당부에만 귀를 기울인다. 이 같은 당부와 사랑으로 인해 너는 세상에 광명이 존재한다는 전설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이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으며, 전능자의 구원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현실에 안주할 뿐, 더 이상 광명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고, 전설 속 전능자가 강림하는지를 더 이상 살펴보지 않는다. 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소생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인류의 내일과 미래는 네 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는 함께 걸어갈 동반자를 잃지는 않을까, 가야 할 먼 길의 ‘방향’을 잃지는 않을까 심히 두려워 아버지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그와 함께 고난을 견디려고 한다. 막막한 세상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로 이 세상에서 각각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너 같은 이들을 줄줄이 길러 냈고,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들을 잇따라 키워 냈다. 또한, 왜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하는 무감각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대거 배출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인류를 하나하나 살펴본 전능자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고, 상처를 입은 인간의 뻔뻔한 모습을 보았으며, 구원을 잃은 인류의 무력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인류는 전능자의 보살핌을 뿌리치고 제 갈 길을 가며, 그의 감찰을 피하면서 오히려 원수와 함께 심해의 쓴맛을 맛보고자 했다. 전능자의 탄식은 더 이상 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고, 그의 두 손은 더 이상 비참한 인류를 어루만지려 하지 않는다. 수없이 되찾고 수없이 잃어버리며 그는 그렇게 사역을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치고 싫증이 난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더는 사람들 가운데서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이 모든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전능자의 오고 감, 그의 슬픔과 실망 또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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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것은 전능자의 생각 속에서, 눈 아래에서 아주 빨리 변하고 있다. 인류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 갑작스레 등장하는가 하면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아무도 전능자의 행적을 헤아릴 수 없고, 전능자의 생명력이 얼마나 비범하고 위대한지 느끼지 못한다. 그는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비범하고, 인류에게 버려지고도 그들을 구원하는 분이기에 위대하다. 그는 생과 사의 의미는 물론, 창조된 인류에게 어떠한 생존 법칙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다. 그는 인류가 생존하는 근거이며, 인류를 다시 부활시키는 구속자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과 계획을 위해 기쁨을 슬픔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다.

    전능자의 생명 공급에서 벗어난 인류는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면서 또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류는 의지하고 도움받을 데가 없음에도 여전히 눈을 감고 싶어 하지 않고, 영혼의 지각이 없는 육을 간신히 지탱하며 이 세상에서 되는대로 살아간다. 너는 이렇게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고, 그 역시 그렇게 아무런 목표 없이 살아간다. ‘오직 전설 속의 거룩한 자만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그의 강림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다’는 이 신념은 무감각한 사람에게서는 쉽사리 실현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은 계속 그렇게 바라고 있다. 전능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서도 전혀 지각이 없는 사람을 혐오한다.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사람에게서 오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한다. 너의 마음과 영을 찾아 네게 물과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너를 깨우고, 네가 더 이상 목마름과 굶주림을 겪지 않게 하려 한다. 더없이 피곤할 때도, 이 세상이 처량하다고 조금 느껴질 때도 방황하거나 울지 마라. 전능하신 하나님, 지키며 바라보는 그이가 네가 언제 돌아오든 너를 안아 줄 것이다. 그는 너의 곁을 지키며 네가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문득 기억을 되찾을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네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지만 언제부터인가 방향을 잃고 길에서 쓰러졌다는 것, 언제부터인가 네게 ‘아버지’가 생겼다는 것, 또 전능자가 그곳에서 네가 돌아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는 그날을 말이다. 그는 답이 없는 응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영을 위해 그가 곁을 지켜 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이 지킴은 무기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끝이 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오늘날 너의 마음과 영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2003년 5월 28일

    추천 내용: 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산상수훈 ― 예수의 비유 ― 계명

    1.산상수훈

    복에 대하여(마 5:3~12)

    빛과 소금에 대하여(마 5:13~16)

    율법에 대하여(마 5:17~20)

    노에 대하여(마 5:21~26)

    간음에 대하여(마 5:27~30)

    이혼에 대하여(마 5:31~32)

    맹세에 대하여(마 5:33~37)

    보복에 대하여(마 5:38~42)

    원수 사랑에 대하여(마 5:43~48)

    구제에 대하여(마 6:1~4)

    기도에 대하여(마 6:5~8)

    2.예수의 비유

    씨 뿌리는 비유(마 13:1~9)

    가라지 비유(마 13:24~30)

    겨자씨 비유(마 13:31~32)

    누룩 비유(마 13:33)

    가라지 비유를 설명(마 13:36~43)

    보화를 감추는 비유(마 13:44)

    진주를 찾는 비유(마 13:45~46)

    그물을 치는 비유(마 13:47~50)

    3.계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우선 ‘산상수훈’에 포함된 항목들을 보자. 이 내용들은 모두 무엇과 관련 있느냐? 확실히 이 내용들은 율법시대의 규례보다 훨씬 수준 높고 구체적이며 사람의 생활과 더 밀착된 것이다. 지금 말로 하자면, 사람의 실제 실천에 더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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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복’에 대한 인식, ‘율법’에 대한 인식, ‘노’에 대한 정의, 간음한 자를 대하는 것, 사람이 이혼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이혼에 대한 언급과 규정, 맹세, 보복, 원수 사랑, 구제 등에 대한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과정에서 실천해야 하는 모든 면과 관련된다. 일부 내용은 지금 시대에 가져와도 적용할 수 있지만, 현재 사람에 대한 요구와 비교하면 다소 얕은 수준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접하게 되는 비교적 기초적인 진리인 것이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의 생명 성품과 관련된 사역에 착수하였지만 이는 율법이 기반이 된 사역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규정이나 규제는 진리와 관계가 없느냐? 물론 관계있다! 이전의 규례든 원칙이든 아니면 은혜시대의 수훈이든 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 있고 당연히 다 진리와 연관된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과 언어로 무엇을 선포하든, 그 기초와 근원, 그리고 출발점은 모두 그의 성품과 속성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비록 현재 시각으로 볼 때 다소 깊이가 얕더라도 진리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하고, 생명 성품이 변화하는 데에 없어서 안 되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훈 중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조항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 어떤 조항이든 다 진리이다. 어떤 조항이든 모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사람됨의 원칙과 범위로,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당시 사람의 생명이 이 정도만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사람의 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단지 이 정도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 정도 범위의 깊지 않은 교훈을 통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땅히 어떤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과 범위 안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는 것인지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두는 당시 사람들의 분량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살던 사람들로선 이러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예수가 전한 말씀 역시 이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어서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각 내용을 보자.

    첫 번째는 씨 뿌리는 비유이다. 이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로, 씨 뿌리는 행위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두 번째는 가라지의 비유이다. 농작물을 심어 본 자나 성인이라면 가라지가 무엇인지 다 알 것이다. 세 번째는 겨자씨의 비유이다. 겨자가 무엇인지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보도록 해라. 네 번째는 누룩의 비유이다. 많은 사람이 누룩은 일상생활에서 발효에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그 아래의 여섯 번째는 보화를 감추는 비유이고, 일곱 번째는 진주를 찾는 비유, 여덟 번째는 그물을 치는 비유이다. 이 모든 비유의 소재는 다 사람의 생활에서 취한 것이며, 모두 사람의 현실 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사람에게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느냐? 바로 하나님이 정상인이 되어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생활상의 언어와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과 소통하며,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장면이다. 사람들 가운데 성육신하여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겪은 사람의 생활에 대한 일련의 체험들은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교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인자의 인성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그는 사람에게 진리와 하나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할 때, 위의 몇 가지 비유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알려 주었다. 이러한 비유는 다 사람의 생활과 관련 있고, 이와 동떨어진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예수는 사람과 생활하면서 농부가 씨 뿌리는 모습을 보았고, 가라지와 누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사람이 보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에 보화를 감추는 비유와 보물을 찾는 비유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평소 고기 잡는 사람들이 그물을 치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류의 생활과 관련된 행위들을 예수가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다. 그는 모든 정상인과 똑같이 하루 세끼 먹으며 일하고 쉬는 인류의 삶을 체험했으며, 타인의 생활도 직접 목격하였다. 이 모든 것을 친히 경험하고 목격하며 예수가 생각한 것은 자신이 더 안락하고 자유롭게 사는 법 따위가 아니었다. 인류의 실제 생활을 경험하며 예수는 삶의 고단함을 보았고, 사탄에 의해 타락한 인류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며 죄 가운데서 힘겹고 비참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친히 인류의 생활을 경험한 동시에, 타락 속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또한, 죄 가운데서 생활하는 인류가 사탄과 죄악에 의해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참혹한 상황을 보고 체험하였다. 예수는 이러한 것들을 신성으로 본 것이냐, 아니면 인성으로 본 것이냐? 예수의 율법인성은 매우 실제적으로 존재했었기에 그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볼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본질, 즉 신성으로도 보았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자신, 예수가 직접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본 예수는, 그때 성육신으로 담당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육신에서 앞으로 담당할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그가 직면할 고통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서 무기력하고 율법아래에서 불쌍히 살며 힘없이 발버둥 치는 인류를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점점 아파 왔고,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싶은 마음은 더 절박해졌다. 자신이 어떤 곤경에 처하든, 자신이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게 되든지 간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겠다는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무엇인지, 담당할 사명이 무엇인지 갈수록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어서 빨리 담당하고자 하는 사역, 즉 사람의 모든 죄를 지고 인류를 대신해 속죄하는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러면 인류가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고 하나님도 속죄제로 말미암아 더는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로써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앞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쳐 희생하고 싶었으며, 또한 속죄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게다가 하루빨리 그 사역을 완성하고 싶었다. 인류 생활의 참상을 본 그는 1분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더 빨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당할 극심한 고통과 수모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 ‘자신을 바침으로 십자가에 달려 속죄제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새 사역을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며, 죄 속에 살던 인류의 삶과 처지가 완전히 바뀔 것이다.’라는 신념뿐이었다. 그의 신념과 그가 하고자 한 일은 다 인류를 구원하는 사업과 관련이 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다음 단계의 사역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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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육신에서 사는 성육신 하나님으로서, 정상 인성이 있고, 정상인이 갖고 있는 감정과 이성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인류의 삶을 보았을 때, 그는 사람에게 교훈을 주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가르쳐 주는 것과 사람이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이끌어 내거나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그 자신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죄인의 형상이 되어야만 사람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사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삶을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는 인류가 죄 가운데 헤매는 삶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아주 강렬한 소망이 생겨났다. 이 소망을 위해, 그는 자신이 하루빨리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예수가 인류와 함께 생활할 때 죄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인류에 대한 성육신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과 보여진 성품은 평범한 사람도 갖추고 있는 것이냐? 평범한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서 살면 무엇을 보겠느냐?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평범한 사람이 이 모든 것에 맞닥뜨리면, 눈높이를 높여 문제를 바라보겠느냐? 분명 그러지 못한다! 비록 성육신 하나님이 겉으로는 사람과 다르지 않고, 사람의 지식을 배우고 사람의 언어를 쓰며, 심지어 사람의 방식과 화법을 빌려 그의 뜻을 표현할 때가 있을지라도, 그가 인류를 대하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은 타락한 인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그는 타락한 인류라면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입장과 눈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육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생각과 인성이 나타내는 것 역시 진리인 것이다.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육신이 선포하는 것은 다 진리의 공급이자 생명의 공급이고, 이는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공급이다. 타락한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관련된 몇몇 사람만을 마음에 수용할 수 있고,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는 이도 단지 몇몇뿐이다. 재난이 닥치면 먼저 자기 집의 아이들과 배우자, 부모만을 생각한다. 비교적 ‘넓은 사랑’을 가진 사람도 고작 어느 친척이나 친한 친구를 생각할 뿐이다. 이보다 더 많은 이를 떠올릴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의 관점과 눈높이에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은 육신은 타락한 인류와 완전히 다르다. 그 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며 보잘것없어 보여도, 심지어 사람의 멸시를 당해도, 그의 마음과 인류에 대한 태도는 그 어떤 사람도 갖출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치에서, 창조주의 눈높이에서 인류를 관찰하고, 하나님의 본질과 마음으로 인류를 대한다. 그는 절대 평범한 사람의 눈높이에서, 타락한 사람의 관점으로 인류를 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의 안목으로, 사람의 지식과 규칙, 학설 등을 평가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이런 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고 타락한 인류가 이를 수 있는 범주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볼 때는 하나님의 시각과 본질, 속성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 이 범주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주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타락한 인류의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 차이는 각자의 본질로 말미암아 결정된 것이고, 본질의 차이는 각자의 신분과 지위,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눈높이를 결정한다. 너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선포와 발현을 보지 못했느냐? 예수가 행하고 말씀한 것들은 다 그의 직분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 사역과 관련이 있으며, 모두 하나님 본질의 선포와 발현이다. 설사 그에게서 일부 인성적인 면이 보여진다 할지라도, 그의 신적 본질과 발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 인성적인 면이 정말 인성의 발현이냐? 타락한 인류와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인성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예수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다. 그가 진짜 타락한 인류 중의 평범한 일원이라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류의 죄악된 삶을 대하겠느냐? 단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인자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이다. …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육신이 받은 고난은 어떤 것일까? 진정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자가 있을까? 어떤 이는 하나님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그의 본질을 몰라 항상 사람처럼 대해 하나님을 서글프고 억울하게 만들었으니 그 고통이 실로 너무 크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은 무고하고 죄가 없음에도 사람과 똑같이 고난받고, 사람과 함께 박해와 비방, 수모를 당하며, 아울러 그를 따르는 자들의 오해와 패역도 참아 내야 했으니 그 고통은 헤아릴 수도 없다고 한다.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너희가 말하는 이러한 고통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진정한 고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에게는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자신에게 진정한 고통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입은 육신에게 무엇이 진정한 고통일까?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는 고통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하나님이 마치 아주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한 기간에 인류에게 본체를 나타내 자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하고, 자신을 낮춰 보잘것없는 육신에 은밀히 거하니 매우 괴로우리라 생각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선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보인다. 심지어 종종 이를 소소하게 찬미하기도 한다. 사실상, 사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느끼는 고통과 다르고 거리가 멀다. 너희에게 사실을 말하겠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 육신이든, 하나님께 있어 위에서 말한 것들은 다 진정한 고통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은 고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성육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받은 고통을 말해 보자.

    하나님이성육신하여 평범한 정상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사람 가운데서 함께 생활한다. 그럼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방식, 법칙, 이념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는 그러한 생존의 방식과 법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혐오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왜 혐오할까? 인류의 생존 방식, 법칙은 어떤 것이고 어떤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느냐? 무엇을 근거로 삼았느냐? 인류의 생존 방식, 생존 법칙 등등 모든 것은 사탄의 논리와 지식, 철학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들이다. 이러한 생존 법칙으로 살고 있는 인류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위배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뿐, 인간성도, 진리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의 본질은 사탄의 논리, 지식, 철학과 정반대이다. 그의 본질에는 공의, 진리, 거룩함 등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제가 충만하다. 이러한 본질을 갖춘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생활하는데, 그 심정은 어떠하겠느냐? 고통으로 가득하지 않겠느냐? 고통스러운 심정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거나 느낄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가 보고 듣고 접하고 체험하며 대면한 것들은 모두 인류의 타락함과 사악함, 진리에 대한 거역과 대적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것이 그의 고통의 근원이다. 즉, 그와 타락한 인류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인류의 타락이 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였을 때, 그와 공통된 언어를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었겠느냐? 인류 속에서는 찾지 못했다. 인류 속에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고 교류할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 것 같으냐? 게다가 사람이 말하는 것, 좋아하는 것,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모두 죄와 사악한 시류와 관련된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대할 때, 가슴이 미어지지 않겠느냐? 이러한 일을 대하는데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느냐? 위안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와 함께 생활하는 자들은 패역과 사악으로 가득 찬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이러한 고통이 대체 얼마나 큰지, 누가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 누가 그것에 신경을 썼느냐? 누가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느냐?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고통은 더욱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냉대와 무감각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늘 그리스도의 처지를 동정한다. 성경에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이 있어 사람은 이 말씀을 마음에 두고, 이것이 하나님이 받은 가장 큰 고통이자 그리스도가 받은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사실로 볼 때, 정말 그러하냐? 하나님은 이를 고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육신이 받은 고통 때문에 불평이나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없다. 또한, 사람에게 무엇을 보답하고 갚으라고 한 적도 없다. 사람의 모든 것, 즉 타락한 인류의 삶과 사악한 모습, 사탄에게 통제받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는 모습을 목도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이 모든 죄악을 용납할 수 없었고 날로 인류를 혐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참아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은 크나큰 고통인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 하나님의 희로애락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발현될 수 없었고, 게다가 따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또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위로해 보려고 하는 자도 없었다. 그는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계속해서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인류에게 지불한 것에 대해 어떤 보답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류의 사악과 타락과 죄악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육신은 끊임없이 이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을 너희는 보았느냐? 분명 너희 중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천천히 체험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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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께서 오시면 공중에서 주님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이는 우리의 관념과 상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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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휴거 되는 것은 정말 하늘 공중으로 올려지는 것인가
        •   환난 전에 휴거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환난 전에 휴거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19년 연말 중국 우한에는 감염성 폐렴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했습니다. 2020년 2월 7일까지 감염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31개 성의 확진자만 31,000명이며, 사망자는 637명으로 집계되었고, 불과 하루 사이에 3900건의 사례가 증가되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이러스는 전 세계 27개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중국 외에서 310명이 감염되었고 필리핀과 홍콩에서 각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WHO는 이번 상황을 국제적으로 주목하는 공공 위생 비상사태로 선포했습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4개월 동안 역대적인 산불이 발생해서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2020년 1월 8일 기준으로 1000만 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되었고 적어도 33명이 사망했으며 야생 동물 10억 마리가 죽은 것으로 조사 됐습니다. 그리고 2020년 아프리카 동부에는 25년 만에 일어난 메뚜기 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약 3600억 마리의 메뚜기 떼가 하루 만에 2500인 분의 식량을 먹어 치우고 있어 아프리카 지역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또 브라질 동남부쪽은 백 년 만에 쏟아진 폭우로 수많은 가옥이 부서지고,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최소 3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전염병, 화재, 병충재, 홍수 등의 이런저런 재난이 발생하고 있으며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달이 핏빛처럼 붉어지는 등의 현상도 네 번이나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주님의 재림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재림에 대해 예언하신 바와 같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누가복음 21:10~11)

    이런 현상을 보면서 많은 분들은 마음이 다급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큰 재난이 계속 발생하고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도 다 이루어졌는데, 환난 전에 우리는 왜 아직 공중으로 들림 받지 못하고 있는가? 신실하신 주님은 말세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꼭 이뤄질 것인데, 아직 우리는 환난 전에 휴거 되지 못하고 있어. 혹시 ‘휴거’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등의 수많은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문제를 놓고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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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거 되는 것은 정말 하늘 공중으로 올려지는 것인가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구절에 따라 환난 전에 공중으로 들림 받아 주님과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굳게 지키는 구절은 바울의 말이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도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바울은 단지 사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했던 어떤 말은 성령의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일부는 바울 개인의 관념과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진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는 일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뜻에 합당합니다.

    그럼 ‘휴거’는 정말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0) 이처럼 주님은 말세에 그의 나라를 땅에 세울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21장 2~3절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11장 15절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언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등의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하실 것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오시면 공중에서 주님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는 우리의 관념과 상상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땅에 세우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계속 하늘로 올라 가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어긋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사역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지으셨을 때, 땅의 흙으로 지으셨고, 아담과 하와가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땅의 만물을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노아의 일가족을 공중으로 올려 홍수를 피하게 하신 게 아니라 방주를 지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홍수가 지난 후 노아의 가족도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율법시대 말기, 사람들은 율법에 대립하여 죽어야 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공중으로 올려 속죄 제사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실제적으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죄에서 인류를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 땅에서 구원 사역을 하시고,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누군가를 하늘에 들어 올리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공중에 들려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역하시는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환난 전에 휴거 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난 전에 휴거 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럼 먼저 ‘휴거’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들림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들림 받는다’는 것은 내가 예정한 후 택하는 이 일을 의미한다. 즉, 예정되고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을 놓고 한 말이다. 누군가 장자의 명분을 얻든, 아들의 명분을 얻든, 또는 백성의 명분을 얻든 전부 들림 받을 대상이다. 이는 사람의 관념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 미래의 내 집에 분깃이 있는 자라면 전부 들림 받아 내 앞에 올 자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영원불변한 것이므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것은 사탄에 대한 반격이다. 내가 예정한 자는 들림 받아 내 앞에 온다.』 이를 통해 들림 받는 것은 우리의 상상처럼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실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시대 말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하실 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이시자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주님의 구원을 얻은 것이 곧 들림 받아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베드로, 마태, 누가 등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은 모두 주님 앞으로 들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환난 전에 들림 받는 것일까요? 대재난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실 것인데, 이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여,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환난 전에 휴거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재난 전에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이긴 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자신의 관념과 상상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당대의 바리새인이 되어 환난 전에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새 사역에서 드러나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대상이 될 것이며 결국 재난 속에 떨어져 애곡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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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전에 휴거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계시록 2장 3절에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여러 번 예언됐습니다. 또 3장 20절에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의 말씀에서 말세에 주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야만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셨다는 증언을 들을 때, 가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찾고 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 맞는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맞이하고 환난 전에 들림 받아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으로 들림 받을 수 있을 지의 여부는 하나님의 음성을 아는지, 겸허한 마음으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이런 것은 보좌 앞으로 들림 받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과거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베드로나 요한 등의 사람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찾고 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에 주님의 말씀에서 그의 음성을 알아 보고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말세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따라서 전염병, 화재, 홍수 등의 재난이 연이어 발생하고 계속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나타남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환난 전에 들림 받을 수 있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어느 교회에서 주님이 오셨다고 증거하는지, 그분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실 말씀을 하셨다고 증언하는지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재림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 생각으로 결단을 내릴 것이 아니라 정말 진리의 말씀이 맞는지, 하나님의 음성이 맞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들림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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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말세에 말씀이 육신 되어 인자로 오셔서 역사하신다고 친히 예언하셨습니다

 

 

 

 

‘구주’는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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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구세주의 강림을 보기를 소망했다. 구주 예수가 수천 년 동안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 왔던 사람들 가운데 흰 구름을 타고 친히 강림하는 것을 보기를 소망해 온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구세주가 돌아와 자신들과 재회하기를 소망했다. 바로 수천 년 전에 사람들을 떠난 구주 예수가 다시 돌아와 유대인 가운데서 했던 구속 사역을 또 행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사람의 죄를 사해 주고 대신 짊어지며, 심지어 사람의 모든 과오를 대신 짊어지고 죄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존경스러운 구세주가 되어 사람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대신 짊어지며 심지어 사람을 위해 예전처럼 십자가에서 죽기를 소망했다. 예수가 떠난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물론,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들까지 그를 그렇게 간절히 그리워하고 그의 강림을 고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은혜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기쁨이 넘치는 말세의 어느 날에 흰 구름을 타고 사람들 가운데 임하여 만인에게 나타나기를 소망했다. 물론, 이 또한 오늘날에 구주 예수의 이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소망하는 바이다. 온 우주에서 구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홀연히 강림하여 그가 세상에 있을 때 했던 “나는 떠난 그대로 다시 돌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후 흰 구름을 타고 하늘 위의 지극히 높으신 이의 우편으로 돌아간 것처럼, 여전히 유대인의 모습을 하고 유대인의 옷을 입은 채 흰 구름(흰 구름은 예수가 하늘로 돌아갈 때 탄 흰 구름을 가리킴)을 타고 수천 년간 그를 애타게 기다려 온 인류 가운데 강림할 것이라고 여긴다. 또 그들에게 나타나 양식을 베풀어 주고 생수가 솟게 하며, 은혜와 자비로 충만한 예수가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고정 관념이다. 하지만 구주 예수는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의 관념과 완전히 상반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강림하지 않았고, 흰 구름을 타고 만인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가 이미 강림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강림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만 있다. 사실 그는 이미 ‘흰 구름’(여기서 흰 구름은 그의 영과 그의 말씀, 그리고 그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뜻함)을 타고 말세에 온전케 하려는 이기는 자들 가운데 강림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비로 가득한 거룩한 구주 예수라 하더라도, 더럽기 그지없고 더러운 귀신들이 떼를 지어 사는 그런 ‘성전’ 안에서는 사역할 수 없음을 사람들이 어찌 알겠느냐? 사람들이 예수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가 어찌 또 불의한 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불의한 자의 옷을 입고 또 그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를 모르고 계속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내려는 그런 자들 앞에 나타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은 구주 예수가 자비와 긍휼로 충만하고 속량으로 가득한 속죄 제물이라는 것만 알 뿐, 공의와 위엄, 진노, 심판을 가득 지닌, 권병이 있는 존엄한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구속주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간절히 바라며 심지어 사람의 기도가 ‘하늘’을 감동시켰을지라도, 구주 예수는 자신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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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말세에도 구주 예수가 강림하기를 소망하고, 유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서 강림하기를 소망한다면, 전체 6천년 경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속시대에 머물 것이다. 또한 말세가 영영 도래하지도 않고, 시대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구주 예수’는 단지 인류를 속량하고 구원하는 분이고, 내가 택한 ‘예수’란 이름은 단지 은혜시대의 모든 죄인을 위해 생겨난 이름이지 온 인류를 끝내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 예수 그리고 메시야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이름들은 내 경륜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땅의 사람들이 부르는 나의 이름이 나의 모든 성품과 어떠함을 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시대에 따라 나에 대한 호칭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도래하면 나의 이름은 또 바뀌게 된다. 여호와는 물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고, 메시야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는다. 대신 크나큰 능력을 갖춘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나는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낸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야로 불린 적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예전에 알았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와 시대를 끝낸 하나님이자 나의 모든 성품을 가득 지니고, 권병과 존귀 그리고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끝에서 나타난(원문: 興起)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들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알아본 적도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러한 이가 바로 말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사람들 눈앞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불꽃 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이 나의 말에 심판받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받기도 하고 산산이 부서지기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말세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바로 돌아온 구세주이고, 온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 제물이 된 적이 있지만, 말세에는 또 만물을 불사르는 뜨거운 해와 같은 불꽃이자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태양임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행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택하고 이런 성품을 지닌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알게 하고, 유일한 참하나님인 나를 경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도 아니고 구속주만도 아니라, 천지와 바닷속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인 내 본래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말세에 강림한 구세주가 여전히 예수라 불리고 그때처럼 유대에서 태어나 사역한다면, 내가 이스라엘 사람만 만들었고 그들만 속량한다는 것이지 이방과는 무관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한 “나는 천지 만물을 창조한 주인이다.”라는 이 말과 모순되지 않겠느냐? 내가 유대를 떠나 이방에서 사역하는 까닭은 내가 이스라엘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세에 이방에 나타난 것은 내가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인 여호와일 뿐만 아니라 이방 모든 선민의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스라엘과 애굽 그리고 레바논은 물론, 이스라엘 외의 모든 이방 족속까지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다. 다만 나는 이스라엘을 내 사역의 발원지로 삼았고, 유대와 갈릴리를 구속 사역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방을 전체 시대를 끝내는 사역의 근거지로 삼았을 뿐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두 단계의 사역(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사역)을 행했고, 이스라엘 외의 온 땅에서도 두 단계의 사역(은혜시대와 하나님나라시대(역주: 왕국시대)의 사역)을 행했다. 또한 이방에서 정복 사역을 함으로써 시대를 끝낼 것이다. 사람들이 늘 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내가 말세에 새 시대를 개척했고 새 사역을 전개한 것을 알지 못한 채 구주 예수의 강림만 하염없이 기다린다면, 나는 그런 자들을 나를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거짓으로 나를 믿는 자라고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어찌 ‘구주 예수’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느냐?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나의 강림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의 강림이다. 또한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내가 이 더러운 옛 세계를 철저히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다시 강림하여 그들을 속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가 온 인류를 다시 속량하여 더럽고 불의한 땅에서 벗어나게 하기를 소망한다. 그런 자들이 어찌 나의 말세 사역을 성취하는 인류가 될 수 있겠느냐?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는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도 없고, 나의 사역을 성취할 수도 없다. 그들은 내가 행했던 사역만 앙모하거나 그리워할 뿐, 내가 언제나 새로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내가 여호와이자 예수라는 것만 알 뿐, 인류를 끝내는 말세의 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아는 것은 그들의 고정 관념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맨눈으로 본 것일 뿐, 내가 행하는 사역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다. 사람들 생각대로 행한다면 나의 사역은 언제 끝나겠느냐? 인류는 언제 안식에 들어가겠느냐? 그럼 내가 어떻게 일곱째 날인 그 안식일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나는 나의 계획대로, 나의 근본 취지대로 하지 사람의 계획대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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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 요한계시록 3장, 하나님 이름의 비밀에 대한 나눔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러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에서 예수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3장에 주님이 다시 오시면 새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이름에 관한 비밀을 읽어 보면서 함께 알아봅시다.

목차

 • 하나님의 이름은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
• 하나님이 시대 별로 다른 이름을 취하신 의미
• 하나님의 말세의 새 이름을 통해 주의 재림을 맞이하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계 6:12),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8) 이처럼 주님은 그의 재림 때에는 각종 재난이 발생하고 달이 붉어지는 현상 등의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명 블러드 문이라 불리는, 달이 피같이 붉어지는 현상이 2011년, 2013년, 2014 년 4월에서 2015년 9월에 걸쳐 모두 4번 연이어 발생하였고, 해가 어두워지는 희귀한 천문 현상이 같이 나타났습니다. 근년에 들어 국제 정세도 불안정합니다. 일부 지역에는 테러 사태가 발생하고, 곳곳에서 지진, 가뭄, 홍수, 화재 등의 재난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에 접어들면서 재난은 더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종 폐렴 바이러스인 코로나 19가 전 세계에 확산되면서 지구촌 전체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또 호주는 수개월 동안 계속되는 산불로 수억 마리의 야생 동물이 죽었고 엄청난 지역 오염이 퍼지고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는 목숨을 빼앗아가는 독감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를 포함하여 여러 지방에 역대급 폭설이 쏟아져 도시 전체가 눈폭풍으로 뒤덮였습니다. 동아프리카도 25년 만에 나타난 역대급 메뚜기 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식량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푸에르토리코의 경우는 102년 만에 최강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필리핀 마닐라에도 화산 폭발로 도시가 화산재 피해를 입고 있으며, 지진까지 발생했습니다. 또한 북미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재앙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달이 피같이 붉어지는 현상도 네 번 연속 일어나는 상황은 주님의 재림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말세임을 느끼며 예수님 재림의 때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오셨고 새 이름을 바꾸어 새 사역을 하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라는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이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오직 예수만이 구주임을 굳게 믿고,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고 다른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오늘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진리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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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은 바뀔 수 있는가, 없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오직 예수이며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은 정말 영원불변할까요? 먼저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성경 기록을 보면, 율법시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으며, 여호와 외에는 구주가 없었고 여호와의 이름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혜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을까요? 왜 예수의 이름을 지키기 시작했을까요? 게다가 성경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에서 예수로 바뀐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여호와’와 ‘예수’의 이름 중에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은 어느 것일까요?

  사실 ‘대대로 기억할 표호’라 함은 그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절대 바뀌지 않음을 뜻합니다. 즉, 그 시대의 사역이 끝나지 않는 한, 그 시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 시대의 사역을 시작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새 이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고 성령의 역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취하셨습니다. 그 시대에서 사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굳게 지켜야 했으며 그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구속 사역을 하실 때는 율법시대의 사역이 끝났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의 이름을 거부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계속 지킨다면 성령의 역사에서 도태되고 버려져 어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거 베드로나 요한 등의 제자들처럼 성령의 역사를 얻고 주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의 새 이름을 받아들이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새 시대의 사역을 함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바뀌든 그는 한 분이시며 다만 호칭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라고 말한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이 영원히 바뀌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이 영원히 바뀌지 않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이 영원불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과 사역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너의 말처럼 하나님의 사역이 영원불변하다면, 그의 6천년 경륜이 끝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하다는 것만 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언제나 새롭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그의 사역이 영원불변하다면, 그가 인류를 오늘날까지 인도할 수 있었겠느냐? 그가 영원불변하다면 왜 두 시대의 사역을 했겠느냐? …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다’는 말은 그의 고유한 소유와 어떠함을 두고 말한 것이다. 너희는 6천년 사역을 어느 한곳에 고정해 두거나 케케묵은 말에 묶어 놓아서는 안 된다. 이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듯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의 사역은 한 시대에 머물 수는 없다. 이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사역했던 것과 같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음을 상징한다.』(<사역 이상 3>중에서) 이처럼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은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바뀔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사역을 하시면서 다른 이름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이름이든 “예수”라는 이름이든 하나님의 본질은 변함이 없으며 여전히 한 분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재림하실 때 새 이름으로 오셨고,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과거 유대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메시야라고 불려야 그들의 하나님이자 구주라고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속 사역을 하실 때, 대적하고 정죄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큰 징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례를 교훈 삼아 절대 자기 생각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말세에도 하나님은 예수라고 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하나님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시대 별로 다른 이름을 취하신 의미

  하나님은 왜 시대 별로 다른 이름을 취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을 취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함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사역할 때 택한 이름으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저주하며, 사람의 생활을 인도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하나님 선민)의 하나님이자, 크나큰 능력을 지닌 지혜가 충만한 하나님임을 의미한다. ‘예수’란 본래 임마누엘을 가리키며,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사람을 속량하는 속죄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는 은혜시대 사역을 행했고 은혜시대를 대표하지만, 경륜의 일부 사역만 대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 선민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 족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그를 위해 제단에 제물을 드렸으며, 성전 안에서 제사장 옷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이 소망하는 것은 여호와의 재현이다. 오직 예수만이 인류의 구속주이고, 죄에서 인류를 속량한 속죄 제물이다. 다시 말해,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에서 비롯된 이름이고, 은혜시대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름이다. 예수란 이름은 은혜시대의 사람들이 거듭나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고, 온 인류를 속량하기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란 이름은 구속 사역을 대변하고 은혜시대도 대변하는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생겨난 고유한 이름이다. 각 시대, 각 단계 사역마다 내 이름은 대표적 의의가 있고,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의의는 바로 이름마다 한 시대를 대변한다는 것에 있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변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을 일컫는 존칭이며,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변하며, 은혜시대에 속량받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람들이 말세에도 구주 예수가 강림하기를 소망하고, 유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서 강림하기를 소망한다면, 전체 6천년 경륜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속시대에 머물 것이다. 또한 말세가 영영 도래하지도 않고, 시대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구주 예수’는 단지 인류를 속량하고 구원하는 분이고, 내가 택한 ‘예수’란 이름은 단지 은혜시대의 모든 죄인을 위해 생겨난 이름이지 온 인류를 끝내기 위해 생겨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구주’는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돌아왔다>중에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을 취하신 의미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율법시대에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취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하실 사역을 상징하며, 하나님이 율법시대에 선포하신 위엄과 진노, 저주와 긍휼의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반포해 인간에게 죄란 무엇인지,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율법과 계명을 지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어기는 자는 저주와 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하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율법을 준수했고,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였으며, 여호와의 인도를 받으며 수천 년을 보냈습니다. 율법시대 말기에 이르러 더 심히 패괴된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바칠 제물이 없어 다 죽어야 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은혜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취하시고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은혜 시대에 하신 사역을 상징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은혜시대에 베푸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의 성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회개의 도를 주셨으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에게 더는 율법에 의해 정죄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시대 별로 하나님은 고유한 이름이 있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히 상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 시대의 새로운 사역을 하실 때마다 시대적 의미를 가진 이름을 취하여 그 시대에서 행하실 사역과 그의 성품을 상징하셨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새로운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시대의 사역을 하시면 더는 옛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새 시대의 이름을 받아들여야 성령의 역사를 얻고 하나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세의 새 이름을 통해 주의 재림을 맞이하다

  그럼 주께서 재림하시면 과연 새 이름으로 바꾸실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이미 주께서 다시 오시면 새 이름을 취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계 4:8),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계 11:16~17) 이러한 구절을 보면 하나님의 새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분명 예수로 불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전능자’를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계시록 15장 3절, 16장 7절, 14절, 21장 22절 등에 “전능자’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언에 따라 우리는 주께서 돌아와 새 사역을 하실 때는 이름을 ‘전능자’로 바꾸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자’라는 이름으로 새 시대를 여시고 은혜시대를 끝내시며,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알고 ‘전능자’의 이름을 가장 크게 일컫게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세에 취하신 새 이름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한 것이 됩니다.

  지금 ‘동방번개’에서 예수님이 오셨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이 이름이 곧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많은 진리를 선포하셨고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심판 사역을 하고 있고, 사람을 각기 부류대로 나누어 밀과 가라지를 나눈다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 말씀의 심판을 받아 정결하게 된 사람은 환란 전에 이기는 자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을 거부한 자들은 대재난 속에 남을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의 심판 사역으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2~13),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30)라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 예언에 근거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재림 예수님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데에 있어 우리는 가난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재림을 맞이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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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6~29)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2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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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록들은 예수가 부활한 뒤 제자들에게 했던 일과 말씀들이다. 우선, 부활한 후의 예수와 이전의 예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그는 여전히 이전의 예수였느냐? 성경에는 부활한 후의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때의 예수는 그 존재가 더 이상 육신이 아닌 영체인 것이 분명하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났기에 문이 닫혔어도 사람들 가운데 올 수 있었고, 게다가 사람이 다 그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와 육신에서 살았던 예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비록 이때의 영체와 이전의 예수는 형상의 차이는 없을지라도, 이때의 예수는 사람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해 영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체는 이전의 육신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렵고, 의문스러운 존재였다.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더 큰 거리감이 생겼고, 신비하고 예측 불가한 존재라 여겼다. 이런 인식과 느낌으로 인해 사람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던 과거 시대의 믿음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므로 부활한 후의 예수가 해야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와 죽음에서 부활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사람과의 관계를 그가 육신에서 사역하던 시기의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와 사람과의 관계로 회복시켜 놓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과 예수가 인류를 구속한 사역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을 터였다. 한편, 부활한 예수가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났다는 이 사실은, 사람들을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은혜시대에 자리 잡게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예수가 ‘사라지거나’ 혹은 ‘말없이 떠나도’ 지난 율법시대로 퇴보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로써 은혜시대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율법 아래 있던 인류도 이때부터 정식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원에 진입하고 새로운 시작을 맞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사건이 가진 다양한 의미이다.

  그는 영체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이 보고 만질 수 있었던 것이냐? 이는 예수가 사람 앞에 나타난 의의와 관련이 있다. 이 구절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보통 영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게다가 예수는 부활함으로써 그가 담당한 사역을 이미 완수하였다. 이론적으로 볼 때, 예수가 원래의 형상으로 다시 사람 가운데 와 그들을 만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영체가 도마와 같은 사람에게 나타남으로써, 그 현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고 사람의 마음속 깊이 새겨지게 만들었다. 도마에게 나타났을 때, 예수는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자신의 손을 만지게 하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했다. 이는 예수가 부활한 후에야 말하거나 행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부터 도마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바로 부활한 후의 예수는 본질이 변하지 않은 원래의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도마의 의심은 그제서야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기간에도 줄곧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단지 죽음에서 부활하고 영계로부터 다시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는 원래의 형상과 성품을 지녔고, 육신에 있었을 때에 알고 있었던 대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그렇게 부활한 예수의 영체를 보게 하고, 그 존재를 만지고 느끼게 해서 도마가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게 하였다. 도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늘 의심하며 믿지 못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도마의 믿음은 직접 보고 만져 봐야 하는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었고, 예수는 이러한 자들의 믿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이 보낸 성육신한 그리스도는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믿게 하기 위해, 예수는 도마에게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 전과 부활 후, 도마의 의심에 변화가 있느냐? 그는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의 영체가 친히 나타나, 직접 몸에 난 못 자국을 만져 보게 하는 것 말고는, 도마가 의심을 해결하거나 내려놓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도마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 못 자국을 느껴 보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도마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고 예수가 부활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한, 예수가 진정한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인정하고 믿게 되었다. 비록 도마는 의심을 내려놓았지만, 그는 그리스도와 만나 함께하며 그를 따르고 알아갈 기회와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케 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예수의 나타남과 이 말씀은 의심 많은 자들의 믿음에 대해 결론과 심판을 내렸다. 그는 의심 많은 자들과 하늘의 하나님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의 실제 말씀과 사역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이 의심을 품은 채 따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게 되는 날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대성공을 거둔 날이며, 그들의 의심이 심판받는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그들의 완고한 의심으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들의 강퍅함 때문에 그들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단지 그림 속 떡으로 허기를 채우려는 헛된 것일 뿐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의심이야말로 하나님을 대하는 그들의 진정한 자세이기 때문에, 설령 예수의 못 자국을 만졌을지라도 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결말은 ‘깨진 독에 물 붓기’라는 말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도마에게 한 말씀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아주 명확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줬던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당시 33년 반을 사람들 사이에서 사역했던 바로 그 예수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부활했으나 그의 모든 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또한, 몸에 못 자국이 생기고,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왔지만 그의 성품이나 사람에 대한 앎, 그리고 사람에 대한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아울러,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왔고 죄와 고난을 이기고 죽음마저 이겼음을 알려 주었다. 그의 못 자국이 바로 사탄을 이긴 증거이며, 속죄제가 되어 전 인류를 성공적으로 구속한 증거임을 알려 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이미 인류의 죄를 짊어졌으며, 그가 구속 사역을 완수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가 돌아와서 제자들을 보았을 때, 그는 그의 현현으로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오늘 실제로 너희 앞에 서 있어 너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나는 너희와 늘 함께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예수는 또한, 도마의 일을 통해 후세 사람들에게 권고하고자 했다. 즉, 예수를 믿으면서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너희는 진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예수를 볼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알려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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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 예수가 의심 많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았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를 정직하게 믿으며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말씀을 하고 어떤 일들을 했을까? 이는 바로 이어서 우리가 보게 될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대화를 보면, 예수는 반복적으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예수가 부활한 후에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 즉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주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요구한 더 높은 기준을 보여 준다. 다그치고 캐묻는 이 말씀은 질문이자 동시에 베드로와 같은 사람에 대한 요구와 기대였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였다.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비록 예수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물어보았지만, 실은 베드로에 대한 질문을 빌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더 많은 자에게 질문하고 싶었다. 다만 베드로가 복이 있어 대표로 예수가 친히 하는 질문을 받았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도마에게 했던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에 비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한 세 번의 질문에서 예수의 엄격한 태도와 절박한 마음이 훨씬 더 잘 느껴진다. 예수는 본성이 간사하고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지게 함으로써 예수가 부활한 인자임을 믿게 하였고, 예수의 신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였다. 예수는 도마를 엄하게 꾸짖지 않았고 그에 대해 명확한 언어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지만,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이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결정을 보여 주었다. 예수의 말씀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한 요구나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 참된 믿음이 전혀 없는 자들이기에, 예수의 요구 역시 그 정도뿐인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이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못 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는 말씀도 하지 않고, 오직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사람을 깊이 반성케 하는 의미심장한 예수의 질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책감과 당황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예수의 애타고 슬퍼하는 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괴로움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애틋함과 보살핌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순수하고 정직한 자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곡한 가르침과 엄격한 요구를 깨닫게 되었다. 예수의 간단한 질문을 통해, 사람들은 주님이 기대하는 바는 단순히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까지 해야 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너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랑은 바로 헤아림과 순종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며 목숨까지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안식의 기쁨과 위안을 드리며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이며 본분이다. 또한, 사람이 평생을 지켜야 할 길이다. 이 세 마디 질문은 베드로와 모든 온전케 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예수의 요구이자 당부였다. 예수의 이 세 번의 질문은 베드로가 인생 여정을 마무리할 때까지 그를 인도하고 격려해 주었다. 또한, 예수가 떠날 때 했던 질문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온전케 되는 길로 가게 되었고, 주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의 마음을 헤아려 주께 순종하고 위안을 드리며, 나아가 자신의 일생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두 유형의 사람을 상대로 사역하였다. 첫 번째는 그를 믿고 따르며,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며, 은혜시대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두 번째는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후에 먼저 가장 의미 있는 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도마에게, 또 하나는 베드로에게 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실한 마음을 대변하지 않느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성을 대변하지 않느냐? 도마에게 행한 일은 사람들에게 의심 많은 자가 되지 말고, 오로지 믿으라고 권고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행한 일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명확한 요구를 제시하고 추구할 목표를 알려 주었다.

  부활한 예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였다. 그들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사람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기대를 남겼다. 즉, 성육신 하나님은 육신으로 지냈던 기간이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영체가 된 다음이든 인류에 대한 염려와 요구에 변함이 없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도 제자들을 염려했다. 모든 사람의 상태를 훤히 알고 있었고, 각자의 부족한 부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체가 되었지만 육신에 거할 때와 다름없이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신분에 대해 사람들이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육신으로 있던 기간 동안 사람에게 높은 수준의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한 후에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성육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확신시켰다. 그의 현현과 부활은 사람이 평생 추구하는 최대의 이상(異象)과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사건은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확신을 주었을 뿐 아니라, 은혜시대의 사역이 인류 가운데 완벽하게 실현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은혜시대 예수의 구원 복음은 점차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에는 아주 큰 의미가 있지 않으냐? 만일 네가 당시의 도마나 베드로이고, 일생 중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만났다면, 그 일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겠느냐? 이 사건을 하나님을 믿는 삶에서 가장 크고 좋은 이상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이 사건을 평생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평생의 에너지를 가장 큰 이 이상(異象)을 전파하는 데에 쏟을 수 있겠느냐? 예수의 구원을 전파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 비록 너희가 이 일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도마와 베드로의 사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 친히 인간 세상에서 인류의 삶을 겪었다. 인류의 타락과 삶의 실상을 보고 난 후,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기댈 곳 없는 인류의 슬픔과 비참함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인성과 육신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더 큰 애틋함이 생겼다. 아마 너희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이라는 표현으로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이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에 대해 걱정하고 관심을 보이던 모습을 묘사할 수 있다. 비록 이 표현이 인류의 언어에서 온 아주 인간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것에 대해, 너희는 체험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느끼고 음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이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기반 위에서 점차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갈 때에야 이룰 수 있다. 예수의 현현은 바로 육신에 있을 때 그를 따랐던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항상 마음에 두고 염려하는’ 심정을 자신의 영체, 즉 신성에 실체화하고 옮겨간 것이다. 그의 나타남으로 인해, 사람들은 또 한 번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함과 보살핌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님은 시대를 개척하고 열어 나가며, 또 시대를 종식시키는 분임이 강력하게 입증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남으로써 모든 사람의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었고, 세상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증거를 얻게 하였으며, 새 시대의 사역 국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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