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마 다들 성경에 적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긷다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여인은 예수님이 바로 예언에 나오는 곧 강림하실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저 평범한 아낙네였고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예수님이 바로 곧 오실 메시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3년 반에 걸쳐 사역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과 짧은 만남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며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은 더더욱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알아차렸을까요? 예수님의 특별한 은혜 덕분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로 들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같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한복음 4:7~10, 13~26, 28~29)

fgdsa

  위의 성경 내용을 통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바로 곧 오실 메시야임을 알아차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처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방비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몇 마디 하시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비범하다고 생각했고 그 후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권능과 능력이 있고 일반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의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는 속사정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일일 뿐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와 전혀 만난 적 없었던 예수님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때문에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으며 예수님에게 어디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냐며, 산으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리고 이렇게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한 마디가 여인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실천의 길도 알려 주시어 하나님께 경배할 때 표면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진심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 여인은 크게 기뻐하며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동네로 달려가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짧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은 즉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에 권능과 능력이 있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속사정도 드러내시며 자신의 타락함도 드러내시고 자신이 갖고 있던 문제와 곤혹도 해결해 주셔서 명확한 실천의 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바로 곧 오실 메시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2.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구하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멸시를 받아왔고 이들은 서로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예상 밖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과의 대화를 거절하지 않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을 듣자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에게 영생의 물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차마 말을 못하는 속사정을 예수님께서 밝히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그 문제를 언급하기 싫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과의 대화를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곤혹을 해결해 주시고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깨닫고 예수님이 바로 곧 오실 메시야임을 알아차릴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진리를 구했기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 더보기

더 다양한 내용을 찾고 계신다면 바로 클릭하세요

  하나님의 약속 

  성경 해설

성경 아모스 8장 11절에 말세에 교회가 황폐할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일까요?

  문제 : 최근 몇 년간 우리 교회는 점점 황폐해지고 형제자매들도 최초의 믿음과 사랑을 잃었고 점점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고 있으며 설교하는 분들도 영 안이 흑암해져서 설교할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도 성령 역사가 있는 교회를 찾으려고 여러 곳에 가봤지만 왜 교회마다 마찬가지로 다 황량하고 각종 각파가 다 기근이 들었을까요?

gfert

  답: 여러분이 제기한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지금은 말세의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고 예언하신 적이 있는데 지금 교계 내에는 불법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계 지도자들은 주의 계명은 지키지 않고 사람의 유전만 지키고, 성경 지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또 자신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은 전혀 증거하지 않고 높이지 않아 주의 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미움받아 버려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교계가 성령 역사를 잃은 주 원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다시 육신으로 오셔서 말세에 하나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하셨습니다. 말세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진리를 발표하셔서 말세 역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정결케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도 말세 역사로 옮겨져 말세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이라야 성령의 역사를 얻고 생명수의 공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좌 앞으로 온 사람들을 이긴 자로 만드시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만드십니다. 하지만 교계에 남아 있으면서 말세 역사를 거절한 사람들은 황폐한 흑암 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건 성경의 예언이 응한 것입니다. “또 추수하기 석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의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라는 말은 말세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인 교회들을 말합니다.

  그 교회들은 하나님의 현실의 말씀을 받아들여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공급을 누리는 것입니다.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는 교계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주의 말씀을 행치 않고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거절하고 대적하고 정죄해서 교계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아 성령 역사를 완전히 잃고 생명수의 공급을 받지 못한 채 황량해진 걸 말합니다. 율법시대 말기에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했던 성전이 황폐해져 유대 백성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제사장들은 흠 있는 제물을 바치고 성전은 장사하는 도적의 소굴로 되었는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주 원인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행치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유전만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려 하나님의 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에 성령 역사를 잃었습니다. 다른 원인으로는 하나님이 성육신해 은혜시대의 구속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인 사람은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었고 새롭게 실행할 길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역을 거절하고 대적한 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도태되어 흑암 속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성령 역사를 얻고 생명수의 공급을 받고 싶다면 지금 온 힘을 다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영 안이 어둡고 교회가 황폐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화 대본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에서 발췌

  더 다양한 큐티 내용을 찾고 계신다면 바로 클릭:

  성경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을까?

예수의 이름은 영원불변한 것인가?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마 12:1)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우선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하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ghdfg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된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며,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렸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관념을 깬 것으로서, 그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린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이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이라는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그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할 때, 즉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할 때, 그러니까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갈 때, 사람이 지난날의 관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새 사역을 가져올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시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속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으며,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해방과 자유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정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시고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이며,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으로 반대하고 대적해도 말이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거나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다.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질 것이다. 그가 어떤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길이었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상이나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살고 있는데, 자유가 조금도 없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도 뒤따라 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할 수 없고 모레는 이사할 수 없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이나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는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asfre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의미한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주 예수가 말하는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성육신한 주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하의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긴 것, 즉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오직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이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는 성전을 가리키는데,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제 너희는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율법시대닫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가 진리의 내용이므로 값나가는 물질 그 무엇으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겠다. 배가 고플 때, 너는 음식물로 배를 채워야 한다. 그 음식이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안타깝지 않겠느냐? 마음이 갈급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감정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본다.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역부족이라 느낄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밥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아니며, 일시적인 육적 안일과 만족은 더더욱 아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온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이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람은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체험 가운데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왜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람이 한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해도, 진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에 안식을 선사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더 많은 내용을 묵상하고 싶다면 바로 클릭: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의 사역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예수님’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충만한 사랑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친히 인간 세상으로 와서 인류를 구속했고, 무고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는 전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누가복음 1:78~79) 주님께 구원 얻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내리신 충만한 은혜를 누렸고, 주님께서 가져다주신 평안함과 희락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은 영원히 자비와 긍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hgdfg

  오랫동안 주님을 믿어 온 저 역시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꾸짖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31~32) 저는 바리새인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바리새인을 향한 주님의 태도는 증오와 혐오임을 보게 되었고, 이로써 하나님의 성품에는 인간이 거슬러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식이 여기까지 이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예수님의 성품에는 긍휼과 자비 뿐만 아니라 위엄과 진노도 있는 걸까?’ 저는 이에 관한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를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한동안 진리를 구한 결과 제게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책에서 저는 아래와 같은 구절을 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는 위엄과 진노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는 아무에게나 죽임을 당하는 온순한 양도 아니고, 더욱이 사람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꼭두각시도 아니며, 사람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공기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스르고 자신의 행정을 거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극도로 혐오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거스르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극도로 노한다! ‘노’는 일종의 정서이고 심정일 뿐 명확한 태도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정서와 심정은 그 사람에게 하나의 결말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이 극도로 혐오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총애도 아니고 지나친 사랑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임이 아니다. 반대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아끼는 것이고, 가엾게 여기는 것이며,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긍휼과 관용에는 그의 기대가 깃들어 있으며, 그의 긍휼과 관용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밑천이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분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다.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에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바뀔 수 있는 것이지 절대 규례가 아니다.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은 시간과 환경에 따라,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점차 바뀌고 달라진다.』

  위의 구절을 통해 저는 깨달았습니다. 창조주인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가득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는 존엄이 있고, 더욱이 하나님의 성품은 인간이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더 심하게는 하나님과 겨루고 대항할 때 되돌아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따르고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따라 바뀜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입니다.

hjfds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며 수많은 진리를 선포하고, 적지 않은 이적과 기사를 보여 주셨던 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에 권병과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함부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주님을 판단하고 비방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독했고, 유대 백성들을 가로막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진리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는 증오였고 ‘화’가 있다고 저주하며 그들을 독사의 새끼, 지옥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유다는 계속 예수님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썼고, 예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진리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 삼십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겨 수치스러운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그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사례도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팔아 얻은 수익 중 일부를 몰래 남겨둠으로써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령까지 공공연히 속였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 결과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이 같은 사실들이 하나님의 성품에는 긍휼과 자비뿐만 아니라 위엄과 진노도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친히 창조한 인류를 사랑하지만 그분을 거역하고 공공연히 맞서는 자에 대해서는 공의 성품의 또 다른 측면, 즉 크게 노하는 면을 나타내십니다. 이로써 저는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대적하고, 적대시할 때는 위엄과 진노를 나타내며, 속죄 제물마저도 무용지물이 됨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브리서 10:26)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반면 진리를 좋아하고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경우, 성령 모독 죄를 범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은 항상 긍휼과 자비로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와 요한, 주를 향해 회개하고 죄를 뉘우친 세리 마태 등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으면 곧바로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예수님의 설교를 열심히 경청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로 그들을 대했고, 늘 그들과 함께했으며, 그들을 축복하고 인도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호의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음으로써 사탄의 종의 역할을 했고 이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22)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엄히 꾸짖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마태복음 16:23) 여기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하는 태도가 염증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고, 사람의 분량이 본래 작음을 이해했기에 베드로를 징벌하는 대신 회개의 기회를 줬습니다. 그 후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베드로는 늘 자신의 행동을 통회했고, 나중에 주님도 베드로가 저질렀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에게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을 맡겼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성품에는 자비와 긍휼뿐만 아니라 공의, 위엄, 진노도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비와 긍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해서 영원히 예수님을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으로 규정하고, 어떤 죄를 범해도 하나님은 노를 나타내지 않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관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또 한 단락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면 사람들은 각기 다른 행실을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의 각기 다른 행실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그가 목석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태도를 알아 가면서 조금씩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다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규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을 쉽게 거스르지 않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이로써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는 글귀의 이치나 이론을 하나님께 씌우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만 일이 닥쳤을 때 매사에 신중을 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말세에 주님께서 재림하는 중요한 시기에, 주님이 어떻게 오시는지, 주님이 어떤 사역을 하러 오시는지, 정말 우리가 상상한 것과 같은지 하는 것들은 우리가 머리로 상상하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더욱이 규정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모든 일에서 많이 구해야 하며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바리새인의 전철을 밟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도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다양한 내용을 찾고 계신다면 바로 클릭하세요

  하나님의 약속

  성경 해설

믿음과 희망을 주는 ccm 찬양 – 만국이 당신의 빛을 좇아

좋은 아침입니다. 믿음과 희망을 주는 찬양을 들으시면서 활기찬 하루 시작해 봅시다.

당신은 넓은 마음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품네
펼치신 두 팔 위엄 있고
그 눈빛은 밝게 빛나네
무한한 사랑과 긍휼 속에
영광의 얼굴 다시 나타나고
막막해진 이 세상에
만 갈래 빛 다시 찾아왔네
악하고 타락된 세상
구세주 다시 필요했네
당신이 희망을 주시니
2천년의 기다림이 끝이 났네

만국이 당신의 빛을 좇아
당신은 넓은 마음으로
신음하는 인류를 품네
펼치신 두 팔 위엄 있고
그 눈빛은 밝게 빛나네
악하고 타락된 세상
구세주 다시 필요했네
당신이 희망을 주시니
2천년의 기다림이 끝이 났네
만국이 모두 와서 당신의 빛을 좇아
악한 자가 더는 해치지 해치지 못하네
어둠도 영영 사라지니 그 이름 칭송하리
거룩하신 그 이름 영원히 칭송하리라

만국이 당신의 빛을 좇아 (3)

더 많은 찬양 듣기

2019 CCM 찬양 모음 — 매일 들어도 좋은 은혜 찬양 연속 듣기

예수는 부활했지만 그의 마음과 사역은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6~43)

hgdfs

  이어서 위의 구절들을 보자. 첫 번째 구절은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은 것과 성경을 풀어 준 것에 관한 기록이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가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한 기록이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예수가 떡과 생선을 먹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희는 어떤 장면이 연상되느냐? 예수가 너희 앞에 서서 떡을 먹는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혹은 예수가 너희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사람과 함께 생선과 떡을 먹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예수가 아주 가깝고 친근하다고 느꼈다면 그 느낌은 맞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들과 마주 앉아 떡과 생선을 먹음으로써 얻으려는 효과이다. 만일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과 대화만 나누고, 사람은 그의 뼈와 살을 느끼지 못하고 멀리 있어 닿을 수 없는 혼 같은 존재라고 느낀다면 어떠하겠느냐? 사람은 실망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실망감을 느끼면 버려진 기분이 들지 않겠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 거리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존경하면서도 멀리할 것이다. 이로써 사람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어 은혜시대 이전의 관계, 하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체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지낼 때 쌓아 놓은 사람과의 거리감 없는 친근한 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체가 두려워 피하려 들거나 그저 바라만 볼 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그를 따르고 의지하고 앙망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람이 그를 알고 다가오고, 그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가족과 자녀가 너를 만나도 알아보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늘 너를 피할 때, 그들을 위해 네가 행한 모든 것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어떤 심정이겠느냐?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때 하나님이 느끼는 심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뒤에도 여전히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났고,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다. 사람을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하나님은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가장 친한 존재로 여겨 주길 바랐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을 얻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된다. 이제 내가 왜 부활한 예수가 떡을 먹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 준 부분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구운 생선을 드린 구절들을 골랐는지 이해가 되느냐?

  예수는 부활 후,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일련의 일들을 하고 말을 했다.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가득하고, 육신으로 지낸 기간에 사람과 쌓은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깊은 애정도 담겨 있다. 그리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도 녹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님은 영계로, 사람이 영원히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더 이상 사람에게 친근했던 주님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지위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멀리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그와 아주 멀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얻기 몹시 어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체로 나타난다면, 또 한 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길 터였다.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너무 높은 존재이고 사람과 같은 부류가 아니므로 더 이상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을 것이라 오해할 것이다. 또한 사람은 죄가 있고 더러워 영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오해할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는 육신에 거할 때 늘 했던 일들을 하였다. 예를 들면, 성경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고 기록된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전에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기도 했다. 예수가 행한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원래의 예수임을 느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지라도 부활했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그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사람들 눈앞에 서 있는 인자는 여전히 원래의 예수였던 것이다. 그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변함없이 자비와 은혜와 포용으로 충만했으며, 여전히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예전처럼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함께 성경을 나누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피와 살이 있어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었다. 사람은 이러한 인자를 아주 친근하고 편하게 느꼈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인자를 마음 놓고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앙망하기 시작했다. 또한, 망설임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은혜와 축복,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더 나아가 그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기 위해 기도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weryu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기간에, 그를 따랐던 대다수 사람은 그의 신분과 말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저 관망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이 기간, 사람들은 예수가 육신에 거한 기간에 했던 말씀에 회의감을 보이다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를 직접 보거나 부활 소식을 들은 대다수 사람은 부인하던 마음이 점차 반신반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 부활한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떡과 구운 생선을 먹어서야 사람들은 예수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앞에서 뼈와 살이 있는 영체를 보고, 모든 이들은 마치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인자가 바로 태고부터 계셨던 그분이구나. 형체도, 뼈와 살도 있는 그가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셨고…’라고 말이다. 이때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정말 참되고 아름답고 오묘하게 느껴졌다. 또 그 마음에 참된 기쁨과 행복, 감동이 가득 차게 되었다. 예수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진정 그가 지극히 낮췄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친근함과 사람에 대한 염려와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와의 짧은 해후는 그를 본 사람들에게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상실감으로 막연하고 불안하며 초조하던 마음,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무감각해져 버린 마음에 위안을 준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는 희망과 의지처가 생겼고, 눈앞에 서 있는 인자가 바로 영원하고 든든한 요새요, 견고한 망대요, 피난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그의 마음과 사역은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현을 통해 사람에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지 간에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곁에 있으며,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한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목양하며,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며,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늘 염려해 주고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원한 의지처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의 가족이며, 사람이 그를 의지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무기력하지 않으며,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속죄제로 삼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예수가 부활하고 나서 했던 이러한 사역들이 사람에게는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참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일들이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했던 기간 동안 어려움과 고난이 가득했지만, 결국 뼈와 살이 있는 영체로 나타남으로써 성육신하여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었다. 그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직분을 시작했고, 또 성육신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 자신의 직분을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를 열고 그 시대가 시작되게 했다. 또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펼쳤으며,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 이끌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확실히 시작과 끝이 있고 절차와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 기묘한 행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이어주는 주요 끈은 바로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하나님의 떨쳐 버릴 수 없는 염려의 마음이었다. 이 성경 구절에, 부활한 예수가 했던 모든 일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기대와 염려, 세심한 관심과 보호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것들을 보았느냐? 이를 보았을 때, 너희 마음은 부지불식간에 하나님과 친근해지지 않겠느냐? 만일 너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가 부활한 후에 너희 앞에 나타나고, 형상이 있어 너희가 볼 수 있었다면, 그가 너희 앞에 앉아 떡과 생선을 먹고 너희에게 성경을 풀어 주고 너희와 얘기를 나누었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기쁘지 않았겠느냐? 가책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전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피하려는 마음, 반발심, 그리고 의심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더 정상적이 되지 않았겠느냐?

  너희는 위에서 교제한, 얼마 되지 않은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 성품의 어떤 작은 흠이라도 발견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더냐?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에 어떤 간사함이나 사악함이 있더냐? 전혀 없다! 그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의 발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나는 너희가 이런 말씀을 보고 깨달은 것들이 앞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 유익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말씀들이 너희에게서 갈수록 더 좋은 성과를 거둬 너희가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도 가까워지길 바란다.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싫증 내지 않고,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귀찮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의 발현과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이 너희에게 동기 부여가 되어 광명과 정의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더 다양한 내용을 찾고 계신다면 바로 클릭

하나님의 약속

예수님 사역

 

말세에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관건적인 시각에 어떻게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까요?

   지금은 말세의 끝자락에 왔어요. 많은 형제자매들이 모두 빨리 주님을 맞이하기를 소망하고 있어요. 하지만 누군가 주님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면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이유로 찾고 구하거나 알아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은 있나요? 만약 거짓 그리스도를 경계하다가 참 그리스도를 문 밖에 거절한다면 이것은 주님을 맞이할 기회를 놓치고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것을 두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다고 하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방면의 진리를 안다면 이 어려움은 바로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까요?

ghdf
하나님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맞는지 알아보려면 그가 나타내는 성품과 말씀으로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해서,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혹은 참도인지 확인하려면 반드시 그의 본질로 판별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입은 육신인지 아닌지의 핵심은 그 본질(사역, 말씀, 성품 등 훨씬 다양한 측면)에 있지 겉모습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겉모습을 살피느라 그 본질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무지몽매한 것이다.』
보다시피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관건은 실질에서 분별하는 것이에요. 즉 사역, 말씀, 성품 등의 방면에서 분별하는 것이죠. 이 몇가지 원칙을 장악한다면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할 수 있어요. 계속하여 며칠동안 우리 함께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를 분별하는 방면의 진리를 자세하게 교제할게요.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래요.

더 다양한 내용을  찾고 계신다면 바로 클릭:

하나님의약속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실 수 있다.

  문제:그리스도가 곧 진리, 길, 생명이고 이것은 성령의 증거이니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적 위인이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한 말은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발표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만약 그들이 발표한 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들은 진리, 길, 생명일까요? 제가 보기엔 그들이 한 말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고 다 하나님의 말씀에 속하는데 왜 그들은 진리, 길, 생명이 아닙니까?

답: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만약 그리스도가 곧 진리, 길, 생명임을 인식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귀한 것으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실질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하신 실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릇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와 길과 생명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발표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진리, 길, 생명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검증하는 기준은 사람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아는지의 여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무릇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들림받아 먼저 온전케 되는 이긴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재난 속에서 연단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모르고 모두 미련한 처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hgsd

  마치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진리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진실로 그분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친히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지만 교계의 사람들과 주님을 믿으면서 떡으로 배불리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을 외면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하나님만 믿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두 눈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온전케 되는 사람입니다. 왜 오직 그리스도만이 진리, 길, 생명이라고 할까요? 우리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실까요? 『생명의 *도는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자신만이 생명의 실질을 지니고 있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생명의 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한다. 창세 이래, 하나님은 생명 활력이 있는 많은 사역을 하였고,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많은 사역을 하였으며,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하는 많은 대가를 치렀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이고, 하나님 자신이 바로 사람을 부활시키는 도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생명의 도가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생명인 이상,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만이 생명의 도인 이상,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영생의 도이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 길,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생명의 도를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더보기

관련 내용 더 보기:

성경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을까?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모두 완성된 것을 뜻하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과 알아야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25:1~12)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

계속 읽기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과 알아야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사탄의 타락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여전히 창조주 권능의 주재하에서 살아간다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타락시키면서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였으며, 인간 세상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또 사람을 해치고 미혹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등의 악행이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는 만물 생령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한 법칙과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과 비교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그것이 날뛰는 것은 추하기 그지없으며, 사람을 역겹게 하고 염증이 나게 한다. 또한 보잘것없고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도 변화시킬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려 준 빛과 공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준 생기로 숨을 쉬고 있고, 하나님이 만든 꽃과 새, 물고기와 곤충들을 누리며,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을 누리고 있다. 낮과 밤은 여전히 끊임없이 교체되고, 사계절 역시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올겨울에 떠나가서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온다. 물속의 물고기는 그들의 집인 강과 호수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매미는 여름날 마음껏 자기들만의 노래를 부른다. 풀 속의 귀뚜라미들은 가을날 가을바람을 따라 노래한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매는 외롭게 지낸다. 사자 무리는 사냥하며 살아가고, 사슴들은 꽃과 풀밭을 떠나지 않는다. 만물 가운데의 각종 생령들은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찰나 속에서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본능과 생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받아 생존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능을 바꿀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생존 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만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고 미혹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만든 물과 공기와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이 공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본능은 변화가 없으며, 인류는 여전히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으로 깨닫고, 두 다리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하나님과 협력하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 심령의 필요는 변하지 않았으며, 인류가 뿌리를 찾아 돌아가려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qwra

  인류가 창조주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다. 비록 사탄의 엄청난 유린을 당한 인류가 더 이상 태초에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아니고, 지식과 상상, 고정 관념 등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탄의 타락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하에 있고, 하나님이 정한 코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사탄에 의해 타락한 인류는 단지 외관상 더럽고 굶주리고 반응도 조금 느리고 기억력도 조금 감퇴되고 나이가 조금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기능과 본능은 오히려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이런 인류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이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부름을 듣고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바로 일어나 그 음성의 근원을 찾아 달려간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창조주를 위해 헌신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의 마음과 영이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깨닫게 될 때, 인류는 사탄을 버리고 창조주의 곁으로 온다. 인류가 완전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창조주가 다시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얻게 될 때, 인류의 기억은 회복된다. 그때의 인류는 진정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관련 내용 더 보기: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창조주가 만물 생령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사실은 창조주의 권능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